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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Apr 12. 2021

제주 자전거 투어 #2: 3번의 고백, 어쩌다 북콘서트

둘째 날 오전, 너무나 눈앞에 삼삼했던 그녀에게 바로 ‘오늘 아침은 너로 정했다’고 프러포즈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아직 저는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여기서 얼른 다른 그녀를 찾아 고백하려 했지만 그녀 2는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고…. 또 다른 그녀를 찾아 1시간을 넘게 달렸지만 도대체가 그녀를 찾을 수가 없다. 마침내 2시간째가 되어 만난 그녀 3… 다른 그녀들과는 달리 어렵사리 만난 그녀 3은 시간이 흘러 바뀐  ‘오늘 점심은 너로 정했다’는 고백을 듣고는 이렇게 답했다. 

이렇게 내 사랑의 결실이 이루어지는구나. 그래, 오늘 점심은 짜장면이다. 


아... 원래 이런 길은 달리면서 힘이 나게 마련인데... 역시 탄수화물 부족이구나...

아침 일찍 일어나 어제 게하 스태프가 챙겨준 두유 하나를 완샷 한 후 길을 나섰다. 그런데, 어제 술을 얼마 먹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체력이 달리지…. 한 시간을 달리다 문득 깨달은 사실.  내가 어제저녁 술 빼고 먹은 거라곤 불닭볶음면 하나와 과자 몇 쪽, 두유 하나가 전부였구나… 그래. 아점을 먹자. 

오늘 아점은 짜장면으로 정했다. 왜 짜장면이냐고? 제주의 봄은 조생 양파로 유명하다. 제주의 양파는 수입종에 비해 그 향이 진하고 아삭한 식감이 도드라져 육지로도 많이 팔려나가고 있다. 4월은 조생 양파를 한창 수확할 시기. 

앙파밭을 지나는데 향긋한 양파 냄새가 확 풍겨온다. 이런 양파는 쌈장에 찍어 반찬으로 먹어도 맛나다

특히 대정과 한경 부근은 조생 양파 재배로 유명하다고 한다. 춘장과 함께 짜장면의 맛을 좌우하는 양파가 제철인 이상, 4월 제주에서는 반드시 짜장면, 그것도 양파의 향과 식감이 도드라지는 간짜장을 꼭 먹어봐야 한다는 건 내 뇌내 망상이고. 

10시 30분이었는데 그냥 한 그릇 주면 안되나. 두고보자 오일장반점

그냥 배고픈 상태에서 밭에서 나는 양파 냄새를 맡으니 짜장면이 확 땡겼다. 도저히 못 참겠어서 얼른 검색한 다음 대정 부근 ‘오일장 반점’으로 갔지만  11시 오픈이라 아직 음식을 낼 수 없다고…. 냄새만 솔솔 풍기고 짜증 나게.  얼른 검색해 찾아간 다른 중국집도 역시 아직 오픈 전. 

아... 경치는 좋은데 맞바람에 언덕에 힘은 들고....

억지로 힘을 내 달려보는데 아… 슬슬 오르막이 심해지네. 시원한 눈 맛 덕에 그래도 힘내서 달릴 맛은 난다. 그래도 너어어무 힘들다. 경치 좋은 곳마다 토스트 좌판이 보이는데 그냥 그거 먹을까? 아니야! 잠시 의지가 약해지긴 했어도 짜장면을 먹겠다는 의지 하나로 페달을 밟아본다. 드디어 서귀포 초입 안덕면에서 중국집 발견. 이름도 뭔가 그럴싸한, 무려 ‘고래성’. 이렇게 고생을 했는데, 당연히 메뉴는 간짜장이지! 

이 요사스런 간짜장의 자태를 보라. 소주가 두잔인 이유는 물어보면 알랴줌

오, 볶아내 온 짜장의 냄새와 모양새를 보니 뭔가 느낌이 좋다.  보통 간짜장이 짜장에 비해 비싸다 보니, 그릇에 담았을 때 먹음직 스럽게 보일 겸 양파를 큼직하게 썰어 볶아낸다.하지만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양파가 제대로 익지 않아 너무 날양파 씹는 맛이 많이 나게 마련이다. 그걸 익히려고 양파를 기름에 오래 볶다 보면 또 너무 불향이 많이 들어가 좀 탄 맛이 많이 나고… 짧은 시간에 양파의 단맛을 끌어내면서 식감을 유지하려면, 양파를 잘게 썰어 빠르게 볶아내는 것이 베스트.

간짜장은 이 비주얼이 제대로마떼구다사이

고래성의 간짜장은 딱 그런 스타일이다. 재료의 통일성을 위해 일반 짜장면도 채소를 잘게 다져 끓인 ‘유니 짜장’인걸 보니 어쩌다 온 집이지만 제대로 고른 듯. 완두콩과 메추리알 고명도 마음에 든다. 

짜장을 부어 넣고 고춧가루를 적당히 뿌린 후 비벼 면을 한 젓가락 후루룩~ 한 다음 소주를 한 모금 넘기니 아.. 제대로네 이거… 그런데 뭔가 좀 아쉽… 식초가 빠졌구나! 식초 몇 방울 치고 다시 잘 비벼 먹어보니 완전 개꿀맛. 세 번째에야 성공한 내 사랑 간짜장 아주 칭찬해. 이 집 가끔 생각날 것 같다. 밥도 든든히 먹었고 소주도 좀 마셨으니(응?) 다시 힘을 내어 출발!!

오르막길을 오르는게 힘들긴 하지만, 또 이런 내리막길 풍경을 보면 고생이 사르르 녹는 것 같기도 하고...

서귀포에 들어서면서 슬슬 고바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남쪽 자전거길은 첫날인 서쪽 코스에 비하면 두 배는 더 힘들다. 긴 시간 이어지는 언덕도 많고 바닷바람, 산바람이 한꺼번에 불어 속도도 잘 나지 않더라. 아니 그런데 좀 너무하잖아. 가도 가도 숙소가 나오질 않네? 아침 7시부터 달리고 달려 오후 3시까지, 짜장면 먹는 시간 빼고 7시간을 내리 달렸지만 아직 숙소까진 두 시간이나 남았다고…. 뭐가 좀 이상한데…

이거 먹으니 순간적으로 힘이 확 나더라. 카페인에 설탕이 들어갔으니 뭐...괜히 체력 사체가 아니지...

아…. 잘한다고 숙소를 서귀포 옆 표선으로 잡아놨는데, 서귀포 끝과 붙어있는 표선이 아니라 성산 일출봉과 붙어있는 표선이구나… 총 달린 거리를 보니 거의 100km… 어째 좀 이상하드라 ㅠㅠ 내일 아침에 온몸이 쑤시겠구나. 일단 에너지 드링크로 체력 사채를 땡긴 후 간신히 죽을힘을 다해 달려서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인 비욘드 게스트하우스는 북카페까지 겸하고 있다. 샤워를 하고 잠시 좀 쉬려니 히피 향 물씬 나는 게스트하우스 스텝 형님이 ‘우리 고기 먹는데 같이 한잔 해요’ 부르신다. 너무 피곤했지만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겠어서 나와보니, 와… 삼겹살에 새우, 갓김치에 뭐 이거 최고구나. 

아니 여행지에서 일류 바리스타가 내린 라떼라니 이게 웬 호강이래

네 분의 작가님들과 아들, 게다가 라테아트 대회에서 우승까지 한 경력이 있다는 바리스타까지. 오랜만에 통기타 꺼내 노래도 부르고 완전 고오급 라테까지 얻어마시며 잘 놀다 마무리하고 들어가려는데 네 분 작가님이 책을 들고 모이신다. 


실례가 안된다면, 저도 끼어도 될까요?


이날은 비욘드 게스트하우스의 사장님이자 문학 비평가이신 이명진 작가님과 첫 수필집 <세상의 당신들>을 내신 이주옥 작가님, 역사와 철학을 에세이라는 카테고리에 담아낸 <철학으로 풀어보는 내맘대로 세계사>를 출간할 예정인 이은화 작가님의 출판 기념회를 더해 평소 친분이 있던 작가님들이 모여 출판기념회 겸 책에 대한 비평을 하는 자리였다. 

나는 구석에 살포시 노트북을 펴고 앉아 작가님들이 서로 책에 대한 비평과 의견을 나누시는 걸 경청하고, 작가님들의 낭독을 듣고 내 의견도 살포시 얹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작가님들과 나눈 책과 수필 이야기... 이게 왠 호강이냐...

여러 예술가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지만, 내가 먹고사는 근간인 글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고 깊게 나눠본 적은 처음이었다. 이런 덕분에 아직 출간도 안된 <철학으로 풀어보는 내맘대로 세계사>를 처음으로 구입하고 사인 받은 1호 구매자가 되었다! 사실 작가님이 그냥 주신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이걸 덥석 받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마침 지갑에 있던 1만 3천 원을 억지로 쥐어드리고 구입함. 이번 제주 여행의 굿즈는 이 녀석이다! 

비록 다리는 쑤시고 몸은 젖은 걸레처럼 무거웠지만 마음만은 여느 때보다도 가득 차오르고 기분이 좋아 새벽 2시까지 여러 노래를 들으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번 여행도 우연이 날 살려주는구나… 


제주환상자전거길 일주 2일 차 요약

-이전글: 제주 자전거 투어 #1:애월, 한림 거쳐 일몰 맛집까지

-코스: 금능 포구-한경-대정 해변-모슬포-안덕-중문-강정-쇠소깍-위미항

            -신흥리-세화항-표선 해변-신천리-비욘드게스트하우스

-거리: 100km(!)

-들른 곳: 고래성 최고, 용머리해변, 강정마을

-마신 술: 출판기념회 전 한라산 몇 병, 맥주 몇 캔. 고사리나물 갓김치 짱

-기억나는 거: 예전 회사 디자인 팀장과 닮으셨던 조일희 작가님께서 직접 낭독하신 수필 ‘꽃, 피다’

                       바리스타 챔피언이 연성한 라테

-다음글: 제주 자전거 투어 #3: 셀프메이드 돔베고기 수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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