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진구의 평양냉면 노포 <서북면옥>에서 소주 시키는 법 알랴줌
드라마 <멜로가 체질> 7화. 학동역 부근 ‘진미 평양냉면’을 찾은 범수와 진주는 평양냉면 한 그릇씩을 두고 마주 앉는다. 나오기가 무섭게 그릇째 육수를 드링킹하는 범수를 보고 진주는 입을 연다.
진주: 냉면 좋아하시는구나
범수: 면은 다 좋아해요. 면 요리 싫어해요?
진주: 아뇨. 라면, 짜장면 뭐 다 좋아하는데 평냉은 처음이에요.
범수: 라면도 좋고 짜장면도 좋고 다 좋은데,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오래 살 수가 없어요.
평양냉면이 없거든.
범수의 행동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릇째 드링킹을 따라하는 진주. 그런데 좀 표정이 이상하다.
진주: 뭔가 잘못된 것 같은데…
인상을 찡그리며 식초를 집어드는 진주를 만류하는 범수의 단호함에 진주의 인상은 썩어간다.
진주: 돈 냈어요?”
범수: 냈죠.
진주: 아, 돈을 내고 먹는거였구나. 아무 맛도 안나길래.
범수: 자, 오늘 먹었으니 이제 경과를 두고 보죠?
진주: 아니, 뭐 한약 먹은 것도 아니고…
범수: 이 음식이 그래요. ‘뭐지?’ 하다 다음에 갑자기 생각이 나. 뭐지 이거? 평냉이 먹고 싶어!
2015년이었나? 한참 평양냉면이 힙스터들 입에 오르내리던 그때, 먹는걸론 힙스터 워너비였던 나는 친구와 함께 당시 크라잉넛, 이적 등 뮤지션들 사이에서 이슈가 되었던 마포 ‘을밀대’로 쳐들어가 호기롭게 냉면과 녹두전, 소주 한 병을 시킨 다음 살얼음이 한가득인 냉면 육수를 들이켰다. 그때 심정이 정확히 진주와 같았다. '음? 왜 이걸 돈내고 먹지… 뭔가 잘못됐는데…' 식초와 겨자를 쳐 봤지만 그냥 시고 매운 밍밍한 국수…
그래, 힙스터의 길은 멀고 험한 법. 나름 뮤지션의 아이덴티티를 유지하려 했던 나는 또다른 뮤지션인 김동률과 존박의 단골집 논현동 평양면옥으로 향했다. 친구와 함께 또다시 물냉면과 제육(평양면옥엔 녹두전이 없다), 소주를 시킨 우리들. 음? 이번에는 얼음 동동 대신 낯익지만 어색한 뭔가가 떠 있었다. 음… 파? 라면과 곰탕에 넣는 그 파? Green Onion? 이번에도 국물을 들이켰는데 뭔가 묘하다. 고기 향이 진하게 나는게 되려 좀 구리기도 하고…. 게다가 면에서는 왜그리 곡물 냄새가 펄펄 나. 아… 만원도 넘게 내고 이런 희멀건하고 밋밋한 국물과 요상한 면을 먹고 폼잡느니 그냥 힙스터 안할란다.
그런데 갑자기 그 다음날, 범수의 말처럼 그 밋밋한 국물과 곡식 냄새나는 면이 자꾸 생각나는거다. 당시 이래저래 일이 바빠 마포나 논현동까지 갈 시간은 없고... 그때 찾았던 평양냉면집이< 서북면옥>이다. 거기서 난 냉면 개미지옥에 빠져버렸다.
서북면옥은 1968년부터 광진구 구의동에 자리잡고 지금까지 인기를 이어가고 있는 노포다. 이곳은 ‘서울 미래유산’으로 선정될 정도로 인정받은 집으로 당시 좁은 가게를 그대로 유지하며 영업을 하고 있다. 가게 앞을 가면 제일 먼저 반겨주는 것은 저 요상하게 생긴 번호표. 저걸 하나 끊어놓고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으면 번호를 불러준다.
이곳은 다른 가게들과 달리 돼지 제육과 소 수육을 모두 판매하고 있다. 직접 만들어내는 이북식 만두가 워낙 맛있어 보통 둘이 오면 만두 하나에 냉면 두 개를 시키는게 기본이고 혼자라면 만두 반접시에 냉면을 주문한다. 하지만 난 ‘선주후면’의 진리를 반드시 지키는 배운 사람. 배운 사람이 남들과 같은 오더를 할 수는 없지.
사장님! 물냉면이랑 소 수육이요~
예전에 제육을 먹어봤으니 오늘은 소 수육으로 주문! 예전 서북면옥은 소의 혀 부분인 ‘우설’을 수육으로 내었지만 아무래도 물량을 대지 못해서인지 이제는 부챗살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주문이 뭔가 허전하지 않나? 선주후면인데, 酒가 없잖아. 심지어 메뉴판에 ‘코로나19 관계로 술을 팔지 않습니다’라고 써있는 마당에 당당하게 주문할 수는 없지. 그래서 종업원 분께 조용히 물어봤다.
요즘도 소주 컵에 따라 주세요?
원래도 서북면옥에서는 좁은 공간에 손님이 몰려들어 11시 반부터 2시 즈음인 점심 프라임타임에는 공식적으로 술을 팔지 않았다. 대신 술을 시키는 분에게 종업원이 속삭이듯 ‘한 병만 컵에 따라서 드릴 수는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역시 이번에도 종업원 분은 웃으며 ‘예~’ 하신다.
이것이 소주. 사기컵 두 개에 가득 부어주는건 ‘하동관’에서 소주를 주문할 때 이야기하는 ‘냉수’ 같은 느낌이다. 자… 사기컵에 냉수 한 모금 하고 슬슬 냉면을 먹어볼까?
서북면옥은 메밀면에 무 절임 고명과 사태 수육 두 점을 얹어낸다. 마치 양평 옥천면옥처럼 두툼하게 뽑아낸 면은 녹말 전분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아 두툼하게 씹히는 고소한 식감이 좋다. 기본으로 얹어주는 수육에도 고소한 기름이 붙어있어 이미 이것만으로도 훌륭한 안주. 소금을 달래서 조금 찍어먹으면 좋다.
육수는 간장 맛의 조금은 달큰한 고기국물인데, 뿌연 색깔만큼 깔끔하다기보다는 뭔가 구수한 맛. 가게 벽에 자신있게 붙여놓은 ‘대미필담’(좋은 맛은 담백한 것)과는 좀 안어울리지만 그래도 맛있음. 평양냉면 초보는 서북면옥에서 시작하면 충격을 좀 줄일 수 있을 만큼 두툼한 맛이다.
이제 자다가도 생각나는 그 맛을 알아버린 평양냉면 마니아인 만큼 방문 횟수가 줄기는 했지만 서북면옥은 충분히 매력있는 평양냉면 집이다. 보통 1만원을 훌쩍 넘어가는 가격이지만 서북면옥은 아직도 8,000원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돼지 제육과 소 수육, 접시 만두도 꽤 싸고 온반과 온면 등 다양한 부가 메뉴를 내고 있다. 혼자서도 자신있게 소 소를 시킬 수 있을 정도라 착한 수육도 매력. 이정도 양에 15,000원을 받는 소 수육은 서울에서 낙원상가 말고는 본 적이 없다. 아무리 호주산 소를 쓴다지만 충분히 매력적인 가격. 아무래도 땅값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요 두 달 갑자기 평양냉면 결핍증이 확 도져서 매번 다른 가게에서 평양냉면으로 점심을 해결하는 일이 잦아졌다. 사실 평양냉면만큼 누구랑 같이 가기 두려운 메뉴가 없다. 워낙 호불호가 갈리니깐. 친구에게 정말 좋은 맛을 보여주고 싶다면 ‘돈 좀 쓴다’ 생각하고 사주겠다며 꼬셔보자. 원래 이런 개미지옥은 혼자만 들어가면 서운하지 않나.
뜬금없지만, 이 냉면 찬가는 평양냉면과 똑 닮은 밴드 '신인류'의 노래 <작가미정>으로 끝을 맺어본다. 기승전결 기복이 극히 없는 '도레도레도레미레미레도' 같은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땐 밋밋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보컬 신온유의 밍숭맹숭한 보컬과 차분한 사운드, 억누른 가사가 자꾸 평양냉면 국물처럼 다음날 생각나더라. 활동 종료 전에 라이브를 보지 못한게 아쉬울 뿐. 아, 마침 이 노래는 <멜로가 체질> OST다.
P.S) 서북면옥은 평양면옥, 필동면옥, 을지면옥 등의 패밀리 냉면집과 정인면옥, 진미 평양면옥 등의 깔끔한 맛을 선호하시는 분들과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느낌으로는 봉밀가, 배꼽집, 피양옥과 비슷하고 우래옥과는 한 10% 정도만 비슷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