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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문 Aug 12. 2024

누가 하늘에 낙서를?

16.

어제 잠을 잔 꼴다이(Coldai) 산장은 치베타 산 바로 밑에 있다. 이 말인즉, 꼴다이 산장까지 엄청 걸어 올라야 한다. 일행 중 생일을 맞이한 가장 나이 많은 선배 생일(78세)이라서 생일 케이크를 배달해야 했다. 자발적으로 한 일이지만 산에 오르면서, 한 손으로 균형을 잡는 일이 힘들어, 끊임없이 욕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인성이 부족한 거야 어쩔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멋진 생일 축하가 되어 고생한 보람을 훨씬 넘어섰다. 동양에서 온 낯선 이를 축하하고 함께 박수를 친 그날 그 밤 산장 분위기를 어디서 재현해 볼까? 시간은 산장에도 어김없이 다녀갔다.

호수에도 낙서를.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다.  잠잘 곳 바졸레르 산장까지 걸어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오늘 내가 얼마나 몇 시간 걸어야 하는지 관심이 사라졌다. 그냥 즐기기로 했다. 그걸 안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기록이야 궁금하면 다음에 확인하면 되고. 스마트폰이 달리 스마트폰이던가. 걷다가 일행들이 경로를 벗어난 것 같아 잠시 어리둥절했다. 분명 오늘 잘 장소로 가야 하는데 엉뚱한 곳으로 접어든 것 같았다. 아니, 저길 왜? 저 높은 곳 저기까지 올라야 하나 다시 입이 쑥 나왔다. 다시 시작된 투덜이 버릇. 그곳이 바로 티시(Tissi) 산장이었다. 걸어오는 내내 저 멀리 높은 정상 부근에 보였던. 그리고 그 정상  레안(Col Rean)이 어떤 선물을 선사해 줄지 예상하지 못했다. 그때까진.

치베타 산군이 끝없이 이어진다.

역시나 제일 뒤에 쳐져 산장을 나와 오르막을 걷다 다시 내려다봤다. 내가 어제 잠을 잔 산장이 무사한지 애정을 가지고 쳐다보던 순간. 어! 하늘에 누가 낙서를 해놓았다. 어릴 때 학교 교실 칠판에 줄을 쫙쫙 직선으로 그린 낙서! 사람이 할리는 없고, 할 수도 없는 낙서. 하늘이 파래서 그런 건지 공기가 깨끗해서 그런 건지 이런 작품을 허락 없이 남겨 놓다니. 저렇게 낙서한 비행기 조종사들을 다 찾아서 혼내줄 수도 없고. 이런 민낯을 가지고 있을지 예상하지 못했다. 돌로미티는 자연만 예쁜 게 아니라 하늘까지 예쁘다니.

정상 등산로. 왼쪽 윗길로 들어섰다.
남이 잘 가지 않는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

잠시 하늘에 취해 언덕을 오르다 보니 저 밑에 호수가 보인다. 호수? 꼴다이 호수라고 했던 것 같은데, 호수와 더불어 호수 주변 사람들이 걸어 패인 등산로가 인상적이다. 참, 지루하지 않게 이곳에 호수까지 배치에 놓다니. 자세히 보니 하늘에 그려놓은 낙서가 잔잔한 호수 위에도 똑같이 그려져 있었다. 잠시 망중한을 보내고 걷는데, 딴짓을 했더니 일행들과 거리 차이가 났다. 뭐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고 자신하던 차 갑자기 객기가 들었다. 이곳 돌로미티란 곳이 등산로가 워낙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어 다른 길로 가고 싶었다. 이제, 어느 정도 이정표 보고 산장을 찾아가는 것이 익숙해졌기에.

벽 중의 벽

치베타 산군은 정말 장대했다. 특히, 벽 중의 벽(walls of walls) 구간이 매력적이었다. 남들이 다가는 안락한 길 말고 다른 길, 표지판에 써진 숫자가 558이었다고 기억하는데, 델러사스 고개인가 어딘가에서 일행과 다르게 벽 중의 벽 바로 밑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저 멀리 일행들이 가는 그 길이 평범해 보이기도 했고, 굳이 저렇게 돌아갈 필요가 뭐가 있지 해서 과감하게 선택했던 길. 후회하냐고? 누군가 열심히 걸었고, 이정표도 되어 있어서 과감하게 걸어 나갔다. 저 멋진 암벽 덩어리 바로 밑에 나있는 그 길. 처음엔 등산로도 잘 보였다. 일행보다 먼저 도착해서 약 올려줘야지 하던 무렵.

꼴다이 산장과 바졸레르 산장 갈림길.

길이 끊어졌다. 다음 목적지 산장을 어떻게 가야 할지 나쁜 머리에 끌로 새겨놓았던 터라 걱정은 없었는데, 나를 믿고 따라온 일행 3명이 우왕좌왕했다. 어떻게 갈지 알겠는데, 눈앞에서 길이 보이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너덜 길을 암석 덩어리들을 돌고 돌아 일행보다 늦더라도 배낭엔 점심이 들어있어, 천천히 가면 어때하고 꿋꿋이 나아갔다. 정말, 저 암벽 덩어리와 함께 걷는 맛이라니. 사실, 이런 것 같다. 이런 풍경을 몸으로 느껴 볼 수 있다는 것. 후회는 해봤자 소용없어서가 아니라 전혀 없었다. 이유야 처음 그 길을 들어설 때 저 멀리 보였던 등산로가 낙석으로 인해 없어졌다는 것을 가까이 가보니 알 수 있어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중에 티씨 산장에서 보니 중간에 산사태로 인해 등산로가 없어졌던 것이다.

꼴 레안 정상 십자가와 저 아래 알레게 호수.

잘 빠져나오는가 싶게 나오면서 일행을 보니, 일행이 이상하게 산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건 오늘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는 건데? 다시, 입에서 구시렁구시렁거리며 걷다가 일탈에 대한 참회로 늦더라도 일행에 합류하자, 남들이 간 길도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하고 따라잡은 곳이 바로 벽 중의 벽에서 봤던 그 높은 언덕배기로 그곳으로 사람들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따라잡아 도착하니, 몇몇은 맥주 삼매경에 빠져있고, 그 일행은 항상 그랬으니, 일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맥주를 마시던 장소는 티시 산장이었고, 저 멀리 보였던 십자가가 있던 곳이 바로 정상이었다. 그곳에 설치된 십자가가 어설퍼 보여 부지런히 올라갔더니 그곳이 바로바로 꼴 레안(Col Rean)이었다.

티시 산장 전경. 이곳에 오려면 저 밑에서 거의 60도 정도 길을 올라와야 한다.

고소공포증이 있으면 바위 끝에 서기 두려워지는 그곳에서 내려다보니 저 아래 알레게 호수(Alleghe)가 보인다. 그때까지도 그곳 어딘가에서 자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가보니 잠자리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때까지 오늘 돌로미티 풍경 맛집은 여기가 전부인 줄 알았다. 진짜 자연이 주는 풍미가 따로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 힘들어도 올라가길 잘했지라며, 360도 경치를 즐긴 후 내려와서 예정했던 등산로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걷다가 걷다가 보니 아주 넓은 들판에 내려와 있었다. 맙소사!

야생화 군락지
마지막 숙박지 가는 길도 여전하다. 오른쪽 풀밭에서 방황하는 내 배낭.

이런 풍경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보았던 야생화 군락으로는 최고로 넓었다. 이 넓은 곳에 다 야생화라니. 지천에 널린 꽃밭에 그냥 뛰어들었다. 배낭을 놓고 뒹굴었다. 지구에 남은 마지막 화원이 이랬을까 과장에 과장을 덧붙여도. 그것이 당연히 뻥이지만. 마지막 화원은 맞았다. 더 이상 이런 꽃의 군락은 없었다. 내일이면 끝나니까. 알타 비아 1이 끝나니까. 그래서인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내 뒤에 오는 이들보다 좀 더 오래 좀 더 천천히 자연이 마련해 준 만찬을 즐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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