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습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문 Oct 05. 2024

해피 라이프

1. 김태호

“이번이 너를 도와주는 마지막이다.”


선배는 말투하나 어조하나 바꾸지 않고 마치 준비한 것처럼 말을 내뱄었다. 듣는 순간 몸 안 깊숙한 곳에서 선 하나가 뚝하고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났다. 그것도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 말이다. 


구본광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한참 후였다. 가을 축제기간 동안에도 동아리에서 신입회원을 뽑았는데, 그때 그가 와서 동아리를 소개했었다. 잘생긴 남자가 그것도 명문대학에 다니는 선배가 와서 재학 중 동아리 활동을 한 경력과 경험이 대학입학과 사교활동에 도움이 되었다고 썰을 푸니 나를 포함한 서너 명이 망설임 없이 가입원서를 냈다. 동아리를 들면 친구가 생길 것 같았다. 엄마가 죽은 후 은둔형 외톨이로 변한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배들이 1학년 교실을 방문을 했었다. 자기가 속한 동아리 후배들을 뽑기 위해 열을 올릴 때도 난 시큰둥했었다. 대학입학에 도움이 되면 모를까 무슨 과외활동을 할까라는 생각을 바꾼 건 난 왕따였기 때문이었다. 외톨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달라질까? 반에서는 서로 경쟁자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서로 친하게 지내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동아리활동을 하는 애들은 뭔가 다를 것 같았다. 이건 단순히 외로워서가 아니라 아닌 생존의 차원이었다. 그랬기에 가을 축제 때 댄스동아리에 가입을 한 것이었다. 


엄마가 병원에서 한 말이 아버지처럼 좋은 대학을 나오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유언이 되었다. 내가 간 다음 날 엄마는 죽었다. 좋은 대학이란 간판을 따면 모든 경쟁의 규칙이 달라질 것이라는 건 내 또래 아이들도 다 알고 있었다. 엄마들의 치맛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엄마가 지금 내 옆에 없다는 거만 빼고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모두 자기 자식의 성공을 위해 매일 수업이 끝나면 학원으로 내모는 부모들. 학교 수업이 끝난 후 학교 이면도로에는 학생들을 학원으로 나르는 차들로 인해 차량 통행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라는 걸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학교선생들은 이미 수업시간에 교과과정을 미리 끝낸 아이들의 관심을 끌려 애쓰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사교육 시장이 무려 20조 원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고, 학교 교사들이 가르치는 교과 과정이 학생들 요구를 따라오지 못해 선생들에 대한 존경심은 눈곱만큼도 없던 시기였다. 그런데 공부 말고 동아리활동이라니. 


그렇게 2년이란 시간이 지나간 후 성적이 명문대학 입학권에 들지 못하자 아버지가 브레이크 걸고 나섰다. 내 교육에 관한 한 아버지는 관여를 하지 않다가 이번에 전면에 나선 것이다. 이건 전적으로 엄마의 역할이었는데 엄마가 없으니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는 나를 위한 배려보다 어떻게든 하나뿐인 아들을 계층사다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독려를 한 것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이 나를 위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그때 처음 들었다. 그런데 그걸 주도한 것이 국립대 교수인 아버지라니. 가끔 방송 토론에 나가 경쟁사회의 기반이 학벌이라는 주장을 줄기차게 주장하며, 적어도 국내 국립대학만큼은 서열을 폐지해서 하나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 모습이 위선적이란 생각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유일한 장남이자 막내아들이 자기만큼 학벌이 좋아야 체면이 선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알만큼 아는 나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고3이 된 날 평상시처럼 학원을 마치고 집에 오니 선배가 와 있었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 생각해 보니 그날 축제에 와서 동아리에 가입하라는 선배였다. 그렇게 끊어진 것 같은 우연한 만남이 인연으로 이어진 날. 알고 보니 선배는 아버지가 교수로 있는 대학 같은 과 제자였다. 거의 1년 동안 같은 집에서 같이 자고 나를 가르친 이유는 나중에 선배가 박사학위를 마친 후 교수로 뽑아주기로 둘 사이에 묵계가 있었다는 건 나중에 아버지 일기장을 읽고 나서였다. 그렇다고 같은 방에서 잔 건 아니고 따로 방을 썼으며 수업이 있는 동안만 같은 공간을 공유했었다. 당시 아버지는 그 과에서 가장 연장자였다. 서울에 있는 국립대학에서 새로 만들어진 과에 처음으로 임용된 교수였다. 그 후 학생들이 늘어나고 수요에 맞춰 신규교원을 채용할 때마다 당연히 후임교원은 아버지의 대학 후배들이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한국에서 최고의 대학을 나온 자타가 공인하는 수재였으며, 같은 동기들과 선후배들이 교육부와 대학 등에서 막강한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매년 많은 프로젝트와 정책연구를 따와 그 자금으로 대학원생들을 지원하고 그렇게 도움을 받은 후배들이 다시 학교 교수가 되는 자기들끼리는 선순환 구조의 정점에 이른 인물이었다. 


아버지와 선배의 노력 덕분에 난 사립명문으로 불리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렇게 선배 구본광과의 인연은 거기까지 인 줄 알았다. 서로 다른 대학이니 다시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대학생이 되어도 별로 달라질 것 없이 1년을 보내고 대학교 2학년이 되던 어느 날 강남역 사거리에서 나의 유일한 동네친구 찬열이를 만나러 열심히 걸어가던 때였다. 늦을까 봐 열심히 걷는데 누가 부르는 소리에 찬열이인가 하고 돌아보니 선배였다. 


- 너 김태호 아니니?


거의 1년 만이었다.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과에서도 외톨이 신세는 여전할 때 구본광을 만난 거였다. 그렇게 만난 그가 반가웠을까? 그가 커피 한 잔을 하자는 제안이 나중에 어떤 악몽으로 변할 줄 그때는 몰랐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란 생각에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었다. 막연하게나마 그가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을 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차 한 잔 마시는 동안 그가 내게 권한 건 모임이었다. 항상 뭔가를 제안하는 선배이자 나름 스승. 그의 말을 거절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화술은 여전히 화려했다. 그렇게 시작한 모임. 이건 고등학교 시절 선배가 있던 댄스 모임에 다시 들어가는 것 같아 무슨 데자뷔 같긴 했지만 그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모임 회장이었다는 말에 부족한 내 안의 뭔가를 자극하는 멋진 선배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한 번 가본 후 결정하라는 말도 굳이 필요가 없었다. 


정규모임에 가보니 주로 강남에 사는 아이들이었다. 이들 회원들은 다들 번듯한 대학이나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자세히 물어볼 필요도 없었지만 자연스럽게 나중에 안 사실은 회원 대부분 그들 부모들이 정부의 고위직 공무원, 대기업 임원이나 판검사 아니면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소위 하이쏘 애들이었다. 그렇다고 그 모임에 들어갈 때 애초 인맥으로 얽히고 얽히는 한국사회에서 그 네트워킹을 조금이라도 활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오로지 고민 없이 단박에 들게 만든 건 그날 모임에 나온 여자애들 때문이었다. 얼굴이 다들 예뻐서 처음에는 몰랐지만 모임에 나가는 횟수와 그곳에서 친해지는 애들이 늘어날수록 그들 얼굴과 몸매가 부모 경제력에 비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 대부분이 강남역 주변에 몰려 있는 성형외과 얘기가 전부인 것 같았다. 어디 어디가 잘한다는 등. 모임에 나오는 여자애들이 성형중독에 빠지건 말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가서 마시고 춤추고 부담 없이 즐기는 태도들이 좋았다. 여기서만큼은 나를 왕따 시키지 않았다. 이건 해방이었다. 그렇게 난 그 모임에 점점 익숙해져 갔다. 그러다 그 모임에서 매주 목요일 번외 모임인 해피타임을 따로 갖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말을 모임에서 친하게 된 같은 학교 민기에게 했더니 나보고 조심하라고 하긴 했었다. 알아서 판단하고 책임지라는 말과 함께. 그때는 그저 뭔가 따라야 할 규칙이 더 있는 엄격한 모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이 모임은 선배가 따로 주도하고 있어서 더 선택하고 말고 할 이유가 없었다. 


그 후 난 전체 회원 모임뿐만 아니라 목요일 모임까지 빠지지 않고 나갔다. 특히, 목요일 모임은 마치 이너써클 같은 특별함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생활이 학교보다는 동아리 멤버들과 노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특히 목요일 모음은 갈 때마다 따로 파는 해피 음료가 아주 좋았다. 18년 산 맥캘란을 베이스로 했다는 음료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수줍고 조용한 나를 완전히 짐승으로 만들었다.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지. 목요일 모임에선 그날 참석한 회원들이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마음대로 데이트 신청도 가능했다. 그것이 가능한 건 비싼 양주와 취기로 인한 자만심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주는 용돈은 턱없이 부족했고 난 술값을 마련하려 편의점에서 시간제로 일하기도 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맘에 드는 여자 회원이 눈에 띄어 애프터를 신청하고 클럽을 나오던 날 모든 것이 한순간에 변할 수 있음을 처음 겪었다. 뭔가 뇌를 날카로운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충격. 아버지가 죽었다. 


여자회원을 옆에 끼고 문을 나서던 순간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 전광판에 아버지 얼굴이 보였다. 정확히는 아버지 사진이었지만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호텔 방에서 죽었다는 뉴스. 실제로 아버지가 죽었는지 내가 확인을 해보기도 전에 세상은 이미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고 있었다. 이상한 건 호텔 방에서 젊은 30대 여성과 함께 둘 다 옷을 벗은 채 침대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뉴스는 아버지가 국립 대학교 교수였고 같이 옆에서 죽은 여성은 같은 과 대학원생으로 추정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은 온전히 해피 음료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 강력한 힘. 


장례식은 아버지가 재직한 학교 의대 장례식장이 거절을 해서 아버지가 나고 자란 소읍 장례식장에서 진행되었다. 그곳 장례식장을 빌린 이유는 아버지가 젊은 제자와 즐기다 같이 죽었다는 사실이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혀서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죽게 한 것이 아버지 혈액에서 발견된 치사량의 마약 때문에 번듯하게 장례를 치를 수 없는 것이 더 컸다. 소읍 장례식장도 처음에는 거절을 했다고 했다. 그곳 사장이 작은 아버지의 동창이라는 건 장례를 치리는 날 알게 되었다. 장례식을 치러야 할지 치르면 어떻게 치러야 할지 경험이 없던 내가 의지할 곳은 작은 아버지 밖에 없었다. 작은 아버지도 처음에는 바로 화장을 하자고 했지만, 작은 아버지를 움직인 건 종친회 간부들이었다. 세간의 평가야 시간이 지나면 흔적 없이 사라질 거고, 그전에 장례만큼은 치린 후 선산에 모시자는 건 어찌 보면 지금까지 아버지가 종친회에 공을 들인 노력이 만든 역설적인 결과였다. 이런 죽음은 조용히 묻히는 것이 상책인데 말이다.  


그렇게 진행된 장례식에는 아버지 종친회 간부 몇 분만 오셨다. 아버지 친척들은 작은 아버지를 빼면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건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아버지 명성을 생각하면 조용히 화장해서 선산에 뿌려야 하건만. 아니 이방식도 좋은 것인지 판단을 하지 못하던 중에  그럭저럭 장례식이 끝날 터였다. 그런데 장례식을 마치고 운구를 화장장으로 모시는 발인 날 구본광이 왔다 갔다. 어떻게 알고 왔을까? 그렇다고 그가 진짜 아버지를 존경해서 온 것 같지 않았다. 와서 조용히 묵례만 하고 돌아가다 내게 한마디를 하고 떠났는데,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처음에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해피 음료에 대해서 언급하지 말라는 대화만 남기고 간 것이다. 맥락은 모르지만 뭔가 잘못이 돼도 한참 잘못된 듯한. 숨이 확 막이는 것 같았다. 처음엔 장례준비로 며칠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이미 몸에서는 해피 음료가 부족해서 오는 금단현상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몸에서 요구하는 해피 음료와 선배 구본광. 이 세 가지가 꼭짓점을 이뤄 내게 비수를 날리고 있었다. 그때서야 막연히 뭔가 아버지의 죽음과 내가 속한 동아리가 무언의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상시에도 머리가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직관까지 허술한지는 정말 몰랐다. 아니면 해피 음료가 날 망가트렸거나. 


그 후 아버지 화장을 마치고 49제를 지낼 때까지 난 집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 하나뿐인 혈육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과 아직 대학생이란 생각이 미치자 호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다. 가쁜 호흡으로 겨우 119를 누르다 바로 연결이 되지 않아 몇 번 시도를 하던 중에 증상이 완화된 것 같아 그냥 침대에 누웠던 기억이 몇 번 되었다. 어느 날은 침대에 너무 오래 누웠던지 몸이 뻑뻑한 것 같아 몸을 일으켜 시계를 보니 시간이 만 하루를 넘긴 적도 있었다. 아버지가 죽어서 없다는 현실이 목을 조이는 것 같았다. 이제 혼자 남았다는 절박함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는 날들이 늘었다. 그러다 이건 아버지와 엄마 뜻이 아니라는 생각에 망가진 몸과 정신을 챙겨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서재에 있던 많은 책들 중에서 비교적 상태가 좋은 책들을 아버지 모교 도서관에 기증을 하려 했다. 그 후 아버지 옷을 정리하려 안방 드레스 룸에 들어갔는데 옷 보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아버지 골프가방이었다. 그것을 치우려고 들어보니 뒤에 금고하나가 놓여있었다. 번호를 누르는 방식이었는데 몇 번 열려다 되지 않아 무심코 내 생일을 누르니 금고가 열렸다. 금고 안에는 돈과 아버지 일기장과 음료수 박스가 나왔다. 음료수 박스? 그걸 열어본 순간 난 너무 놀라 한참을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그건 내가 목요일 모임에서 마시던 해피 음료였다. 해피 음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하는 순간 바로 구본광의 얼굴이 떠올랐다. 몸에서는 이미 금단현상 때문인지 난 아버지가 남긴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다. 어쩌면 며칠간 힘들었던 것도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없다는 충격 때문에 뇌가 잠시 해피 음료를 잊었던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구본광은 선배가 아니라 악마의 자식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구본광과 관련되지 않은 내 인생이 있기나 한 것일까? 여전히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여전히 구본광과 아버지와의 관계가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선후배, 스승과 제자 그 이상 뭐가 있을까? 구본광이 바라는 바가 뭘까? 아버지와 여제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 도대체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다. 누군가 만나는 것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원래 내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다. 은둔. 집에 있는 냉장고와 팬트리에 있던 물건이 동날 때만 난 집 밖을 나서 세상과 조우했다. 어떻게든 배를 채울 때는 허겁지겁 먹는 것에 정신을 팔다 배가 부르면 다시 해피 음료가 생각났다. 클럽에서는 플라스틱 병에 든 음료를 위스키와 섞어 온 더락스로 마셨는데, 마시다 보니 박스에 든 50개가 금방 사라졌다. 


이렇게 보냈다간 뭔 훗날 아버지와 엄마를 저 세상에서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몸을 움직여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을 하나 둘 찾아가기로 마음먹은 날 전화가 왔다. 몇 번 울리는 벨소리가 귀찮아 그냥 받았더니 구본광이었다. 그날을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49제 지내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잘 지내지?


그가 왜 전화를 한 건지 물어볼 생각도 못한 채, 난 다짜고짜 만나자고 했다. 할 말이 있다고.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고. 아버지 방에서 나온 해피 음료는 뭐고 아버지와 함께 침대에서 죽은 여자는 누구냐고. 결국 가장 물어보고 싶었던 말은 선배 너는 도대체 누구냐는. 이런 말을 물어야 했는데 정작 내 입에서는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해피 음료가 다 떨어졌다는. 해피 음료를 달라고 울며 매달렸다. 그렇게 성사된 만남. 그렇게 우리는 신촌역에서 4시 가장 가까운 시각에 홍대입구역으로 떠나는 지하철 맨 앞 칸에서 보기로 했다. 카톡으로 신호를 줄 테니 그때 그 전동차에 타라고 했다. 토요일 오후. 세상이 돌아가는지 내가 돌아가는지 몽롱한 정신을 겨우 이겨내면서 걸었다. 걷는 발걸음이 이상했는지 주변 사람들의 눈초리가 점차 많아진다고 생각하면서 난 겨우 2호선 지하철에 올라탈 수 있었다. 오후 4시에 가장 근접하게 떠나는 지하철 맨 앞 칸. 그렇게 만난 구본광. 넌 도대체 우리 아버지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냐고 물어보겠다는 다짐은 어디 가버렸다. 그리고 나온 말은 해피 음료를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가 한 말. 


“이번이 너를 도와주는 마지막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