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어느 순간 봄은 순삭 한다. 봄이 스스로 순삭(旬朔) 한 건, 순삭(瞬削) 하기도 한다. 이제 정말 봄은 순삭 한다. 이유가 어쨌든. 앞에 순삭은 열흘 혹은 한 달가량의 기간을 말하니 그 말도 맞다. 후자 순삭은 순간 삭제의 줄임말이니 이도 맞는 말이다. 후자 뜻이 점차 아쉬워지는 봄을 말하기에 더 적합해진다. 후자 순삭은 속도감을 말하는데, 여기서 속도는 아쉬움에 비례한다. 어쨌든, 봄은 순삭 한다. 그러니 아쉬운 것이다. 봄이 순삭 한다고 아쉬운 마음까지 순삭 하지 않는다. 그러니 순삭 그 순간을 즐길 수밖에. 그러니 떠난 것이다.
오랜만이다. 아마 2년 전에 설악산을 올랐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첫차를 타고 한계령에 내렸다. 그곳엔 서북능선이 있어 그걸 걸으면 설악산 정상에 이른다. 그렇다고 바로 대청봉에 닿는 건 아니고, 중청 어딘가에서 시작해서 대청봉에 오르면 된다. 그렇게 올랐던 봉우리, 그곳에서 내려다보이는 속초와 동해 바닷가. 상쾌했다. 서울 근교에도 명산이 많지만 뭔가 맛이 떨어진다. 그건 원행이 주는 맛이다. 분주한 도시를 떠나는 맛이 없다. 그냥 일상 속에서 잠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한. 그것이 서울 근교 산행이라면 자차 건 남의 차건 멀리 떠나는 원행이 좋다. 산도 산이지만 '떠남'이 주는 설렘 때문에 산은 산이지만 산을 다르게 받아들이는 원행이 훨씬 좋다.
그때는 설악산 대청봉과 공룡능선이 목표였는데 올해는 공룡능선만 목표였다. 대청봉에 굳이 오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사실은 체력이 자신 없어 대청봉에 오르지 않은 것인데, 여긴 사정이 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걸 말하려니 좀스럽다. 그땐 한계령에서 시작해서 서북능선을 거쳤으니 당연히 중청대피소에서 하루 잔 것이다. 이러니 대청봉에 오르지 않으면 이상하다. 하루 잠을 잔 중청대피소에서 희운각까지 이르는 하산 길이 고행길이라서 이렇게 계획한 것인데, 진짜 내막은 그때 희운각 대피소가 공사 중이었다. 중청대피소는 문을 열었으니 계획이 그리된 것이다.
국립공원 대피소 중 가장 최근에 리노베이션을 한 희운각대피소가 국내 대피소 중 무궁화 다섯 등급으로 불리는 이유는 딱 하나 때문이다. 그건 화장실, 수세식이다. 이왕 이럴 걸 비데까지 달았으면 좋으련만. 이건 안 되는 걸까? 건의한다고 들어줄 것 같지 않은 건 대피소란 이름 때문이 될 것 같다. 하나 더 굳이 하나 더 꼽자면 그건 물이 풍부하다. 워낙 설악산이 물이 많은 산이지만, 이건 계곡이 깊다는 혹은 산이 높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대피소 앞에 물이 솟아내린다. 수돗물처럼. 그렇게 해놨으니 그런 것이지만 좋다. 적당히 양치질도 몰래 하고.
공룡능선을 타기 위해 1박을 하지 않는 별종들이 있지만 그건 산 좋아하는 이들 톱 10에 들아가는 이들이고 진짜 장 씨도 아니고 이 씨도 아닌, 장삼이사인 나 같은 사람들에겐 정말 그림의 떡이다. 그러니 1박을 택한 건데 요놈의 1박이 보통 효자가 아니다. 아픈 무릎과 발목 관절을 위한 치유책이다. 무리해서 좋을게 뭘까? 연골의 유효기간이 사람마다 다르지만 엄연히 유효기간이라서 아껴야 한다. 이건 정말 비밀(?)인데, 소청대피소와 희운각 대피소에 가면 냉찜질 팩이 있다. 세상에?? 세계 최초 서비스 아닐까? 대피소에 찜질팩이라니. 무료에다 누구나 이용 가능한데 설마 이걸 가져가는 인간도 있겠지? 암튼, 이건 국뽕이다. 희운각 의자에 앉아 냉찜질 팩 4개를 발에 두르고 있었다. 일행이 올 때까지.
퇴행하는 관절에 어떻게든 저항을 해야 하니. 그걸 한 건 사실 소청대피소에서 남들 하는 걸 보니 배가 아파(?) 서였지만, 일행 중 한 명이 굳이 대청봉에 오른다고 올라갔다. 사연은 이랬다. 이번 산행은 백담사에서 출발했다. 봉정암을 거쳤으니 경로 상 소청대피소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대청봉에 갈 사람과 바로 희운각으로 내려갈 사람을 정한 것이다. 이번 코스가 한계령에서 출발하는 코스보다 길어 체력이 달리는 사람들은 희운각으로 내려간 것이고 체력이 출중한 이는 대청봉에 올라간 것이고. 경치야 소청봉 대피소가 대피소 중에서 최고 인건 그곳 의자에 앉아 용화장성과 공룡능선과 서북능선을 다 볼 수 있어서인데, 여기서 1박을 하면 공룡능선을 타기가 만만하지 않으니 패스. 경로 상 거치는 곳이라서 패스해서 내려갔다.
여기서 잠깐, 대청봉에 혼자 오른 괴물은 20대 군대 생활을 전방에서 했는데 하루에 한 번 600~700미터 고지를 오르내렸다나 뭐라나. 그것도 몇 년을 군장교로 복무하면서 젊은 날 그랬으니, 그 자의 관절과 다리 근육은 최고였을 텐데, 그랬으니 대청봉과 공룡능선을 등산 스틱 없이 걸었을 것이다. 더불어 산에 가면 반드시 나오는 쓰레기를 한 손에 들고 일정을 소화했으니 괴물은 괴물이었다. 그것도 하산 길을 한 손에 쓰레기봉투를 들고 앞에서 사라지는 친구를 따라잡으려 발버둥 치는 발 4개짜리 덜렁이 신세라니! 그는 필경 장삼이사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날 업고 내려올 수는 없을 터! 그런데 나중에 그랬다. 너 정도 업고 내려오는 건 일도 아니라고. 뻥이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산에 오르면서 혹은 내려가면서 머리를 굴리니, 하루에 공룡능선을 오간다는 1년 선배와 나이 70대 선배가 생각났다. 가능할 것 같았다. 굳이 관절을 무리하며 그렇게 바삐 왔다 가야 할 필요가 있는가 와는 상관없이 할 것 같다는 결론. 그걸 선택하지는 않겠지만 이런저런 조합을 떠올리며 다음에 온다면 혼자서 해보겠다는 욕심을 잔뜩 먹은 건 소득이었다, 이걸 자신감이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무릎에 4개의 냉찜질 팩을 두르고 자랑스레 앉아있는데, 옆에 있던 낯선 산꾼이 한마디 거든다. 자기는 공룡능선만 300번 왔다 갔다고. 좀 전에 운무를 보러 비선대를 갔다 왔다는 말과 더불어.
그러고 보니 날씨 얘기를 안 했는데, 간 날 혹은 도착한 날 저녁부터 비가 온다고는 했었다. 다행히 밤에만 비가 오고 새벽 6에 그친다던데, 비가 오건 말건 대피소에선 그냥 잠을 잤냐고? 잤겠어? 마시지 않는 커피를 몸이 힘들어해서 두 잔을 마셨더니 멀뚱멀뚱, 2층에선 그날 코걸이 왕을 뽑았다면 1등 했을 사람이 있었으니. 가지고 간 침낭은 그렇다 치고, 생각해 보니 베개를 가져오지 않았던 것. 그런데, 짜증을 낼 수 없었던 건 몸이 천근만근이라서 비몽사몽을 했으니, 세상 어디 가도 적응 하나는 잘 해내겠다는 다짐이 무색할 터. 기어이 새벽이 오고 말았다. 희운각에서 시작하니 서두를 필요 없어 대피소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출발했다.
사실, 공룡능선은 북한산 정도 오르는 사람이 무난히 걸을 수 있다. 전체 길이 4.9km라서 무리가 될 리가 없지만, 그것이 1,500m 정도 높이에서 시작하거나 끝내야 하니 이래서 힘든 것이다. 그냥 보기엔 공룡능선 사촌 용하 장성이 더 멋있어 보기는 하지만 그곳은 비법정탐방로인 데다 험하고 위험해서 굳이 목숨이 짧음을 시험해 볼 필요는 없으니 가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남들이 공룡능선 어쩌고 떠벌리는 건 무용을 자랑삼아서라기보다는 그 능선이 아기자기하고 걷기(?) 좋아서이다. 우리가 걸은 수렴동 대피소를 지나 만수 폭포, 관음폭포, 쌍용폭포, 봉정암을 오를 때만 해도 손을 사용하지 않으니 잘 모른다.
진짜는 희운각대피소를 떠나 바로 맞이하는 무너미 고개에서 시작된다. 이때부터 손이 발이 되어 움직이며, 힘들만할 때 도착하는 곳이 신선대이다. 이곳에 오르면 능선 전체가 보이는 조망이어야 하거늘 오늘은 온통 구름이다. 밤새 내린 비 여파가 심술을 부린다. 보여야 신선인 척할 텐데, 그냥 마등령 방면으로 노인봉, 1275봉, 킹콩 바위, 큰 새봉, 나한봉이 있으려니 할 수밖에. 그렇다고 돌아갈 수도 없고. 공룡능선이 좋은 건 일단 능선에 두 손을 대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걸어 나가야 하는 건 좋은 것 같다. 임전무퇴라서. 능선은 중간에 샐 수가 없다. 그러니 가긴 가는 데 가니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였는지 기억에 없다. 확실히 1275봉에 도착하니 하늘이 파랬다는. 하늘이 파란 거야 어디든 파랬지만.
나한봉 인근까지 가면 오른편으로 울산바위가 보인다. 다 온 것이다. 마등령은 말 그대로 령이라서 잠시 지친 몸을 쉬어주고 내려가면 되는데, 이곳부터 오세암까지 1.4km 내리막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산은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힘들다. 당연히 무릎에 중력이 달라붙어 힘들어도, 내리막은 산행이 다 끝나간다는 의미라서 몸이 알아서 반응한다. 곧 끝난다는. 그럼 이번 글도 그만 끝내야 하거늘. 이번 백담사에서 시작해서 백담사에서 끝낸 여정은 남는 아쉬움이 도드라졌다. 그건 저질 체력으로 버틴 2년 전보다 나아졌다는 것보다 오가며 들른 백담사, 영시암, 봉정암, 오세암 등이 고색창연하지 않아서였다. 영시암이야 워낙 평지에 있다고 해도, 봉정암과 오세암은 이름이 암자임에도 무슨 사찰처럼 거대했다는. 백담사란 이름은 고색 하건만 유명해진 건 전두환 때문이라도. 좋은 건 좋은 거지만. 거긴 김시습도 있었고 만해 한용운도 있었으니 순삭 하는 봄 꼬랑지나마 잡아봤으면 된 것이다.
그럼에도 날씨로 인해 시야가 막힌 공룡능선 때문에 꽃이 보였다는 건 아이러니다. 삶이 그런 것처럼 간절하면 바람이 잘 이뤄지지 않는 듯 느껴지듯이 지난번 그렇게 보려던 산솜다리, 에델바이스를 마음껏 봤다. 이거 같다. 경치 보러 산에 갔는데 비로 안개가 끼고 이로 인해 시야가 가려 눈을 옆으로 돌리니 거기에 꽃이 있었다. 예전에도 그곳에 있던 꽃이 여전히 있었는데 비로소 지금 눈에 들어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