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에 단종이 없었다면! 단종이 없다면 영월은 영월이 아니다, 그럴 수도. 이 둘은 짝꿍 같다. 둘을 얘기하면 반드시는 아니지만, 빠지면 섭섭한. 단종 입장에서 보면 억울했을 것 같다. 급이 맞지도 않는데 말이다.
내가 무슨 연고가 있다고 이 먼 곳에 유배를 시키다니.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난 권력욕이 없는데. 왕이 된 게 내 탓인가,라고 단종이 하소연했을 것 같다. 이렇게 역사가 나를 기록했기에, 어쨌을까? 난 세상에 없다고!
누군가로부터 기억이 되고 끊임없이 나로 인해 대화가 되니, 그게 스캔들만 아니라면, 좋건만. 난 세상에 없다. 영원히 앞으로도 비운의 왕세자, 아니구나. 난 왕이었었구나. 지금처럼 잊히지 않고. 이런, 정치가 뭐라고. 권력이 뭐라고.
가을이 이곳에도 왔다
이건, 과거다. 그런데, 자꾸만 현재가 나를 소환한다. 죽은 나를 산 단종처럼 끊임없이 소환하는 곳. 바로, 영월이다. 누가 단종을 기억할까? 역사에 특별히 관심이 있다면 모르지만. 과거지만, 여길 가면, 단종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하고, 말하게 된다.
영월, 그 작은 읍에서도 단종이 없었으면 의미가 없었을 청령포와 장릉. 뭐, 단종이 없어도 청령포는 있었겠다. 장릉이군. 내가 죽었으니, 장릉은 평생 나를 팔아가며 영생을 누리겠군...
강원도 영월. 그 말을 떠올리면 무엇이 생각날까? 당연히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 별마로 천문대를, 누군 장릉과 청령포를, 누군 선돌과 한반도 모양을 떠올릴 것이다. 아님, 동강 래프팅이나 패러글라이딩! 종교에 관심이 많다면 영월 종교 박물관도 있다. 연식이 된 사람들만 단종을 떠올릴까?
영천
청령포나 장릉에도 제법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굳이 이런 얘길 꺼낸 이유는 결과지만 강원도 영월의 주인공이 단종 같아서 하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슬픈 얘기지만, 단종 스스로 생각이나 해봤을까? 죽었는데, 날 찾아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는 것을.
언제였더라? 태정태새문단새예성연...하고 열심히 외웠던 그 문종의 아들, 단종. 나중에 세조가 된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 저세상으로 떠난 어린 왕. 비극적이다. 나이 16세에 죽다니. 왕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권력 쟁탈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권력이 중요한 것은 알겠는데 무섭기도 하다.
어차피, 당시 권력투쟁을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이 주도적으로 벌린 일이지만, 거기서 밀려나면 죽음 외에 달리 답이 없다는 게 역사가 말하고 있다. 하늘에 태양이 두 개 일 수가 없으니. 지금이나 그때나 그저 평범함의 대가로 오래 살 수 있는 게 더 좋았겠지?
권력투쟁, 혹은 권력 쟁취라는 게 어디건 일상은 아니지만,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일이거늘. 그냥 생각나는 나라, 굳이 다른 나라와 비교를 해보라면 영국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영국의 장미전쟁! 그곳에서의 정쟁은 더 참혹했던 것 같은데, 영월을 방문해놓고 영국을 떠올리고 거기에 장미전쟁까지... 허세가 심하군! 그게 아니고, 권력이란 게 형제간, 친척간 눈에 뵈는 게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건데...
우리에겐 유교 때문인지, 통치에 유리하기 때문인지, 주로 혈육의 정통성은 오로지 직계만이 가진 보증수표였는데, 이게 간혹 부도를 맞는다. 방계는 적자가 아니니, 기본적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데, 밀려나기 싫은 게 인간이라, 언제든지 수양대군 같은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장릉에서 펼쳐진 공연. 관객 대부분이 젊었다.
그럼 중국은 어땠는데? 주나라주공은 주나라를 창건한 개국공신인데, 당시 무왕의 이복동생이었다(역사 왈). 그의 왕이자 형인 무왕이 죽은 후에 어린 조카 성왕을 도와 주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했다는. 배다른 형제 조카를. 맘을 먹지 않은 것인지, 그게 불가능한 건지, 주공의 인간성이 좋은 건지. 이건 정말 예외다. 그러니 주공이 역사 속에서 그렇게 칭송을 받겠지. 그런 주공이 어린 조카를 폐위하고 왕권을 찬탈했다면 역사는?
얼핏 든 생각은 조선의 근간이 유교였을 텐데, 그 유교가 힘을 발휘하지 못했나 보다. 내가 힘 있어야 유교도 유교가 되는군. 유교는 어디까지나 권력을 쥔 자의 통치 이데올로기로 작동만 했었을까? 권력은 누구든 쥐고 싶은 게 본능이라 꼭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 우리만 그렇겠는가. 그래서, 슬픈 얘기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이게 영월을 영월이 다른 읍, 제천이나 단양과 다르게 만든 결정적인 요소 같다.
▶ 청령포
영조 때 세운 금 표
단종이 유배되고 죽은 곳이라 무슨 사연이 있을까 했더니, 그냥 예전에 청령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청령포. 왜 이곳으로 유배시켰을까? 옛날에 이곳이 외딴곳, 수도 한양과 먼 곳이라 유배될 만한 장소긴 했지만.
기록에 뒤에 서있는 육륙봉이 험준해서 도망가기 어려워 유배 장소로 정했다는데, 지금 보면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곳도 동강이 아니라 서강이다. 영월에서 볼만한 선돌, 선암마을 등이 서강에 있다. 이곳에 왕이 머문 어소가 있었다.
단종이 이곳에 머문 것은 고작 두 달이다. 그해 여름이 홍수가 크게 나서,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두 달만 머문 곳인데, 그 얘긴 쏙 빼더라도 그냥 짠해서라도 와보게 된다.
오고 싶다. 결론, 단종이 이곳에서 죽은 게 아니다. 죽은 곳은 아니지만 와볼 만하다.
이곳은 길가에서 표를 사서 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배를 탁고. 배가 운치라도 있으려나 했더니, 목선도 아니고 모터로 움직이는 그것도 눈앞에 뻔히 내릴 곳이 보이는데, 이게 없으면 물을 건널 수 없다. 지자체는 앉아서, 그냥 돈을 마구마구. 봉이 김선달이라고 하면 김선달이 섭섭하겠지?
국가지정 명승지 50호. 이걸 알고 이곳에 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단종 유배지. 그런데, 2달 체류. 세트메뉴 같다. 장릉과 청령포 말이다. 머문 기간이 짧다면, 이를 보충할 멋진 소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 349호 관음송. 대략 600년 정도 먹은 나이인, 자란 높이가 높다. 두 가지로 갈라선 것도 멋있고.
그런데, 이름이 관음송이다. 이게 좀 이상하다. 이 나무가 단종의 비참한 보습을 보고 들어서 관음송이라고 한다나. 소나무가 보고 들어? 그것도 두 달 남짓 여기서 머문 단종을? 역시, 왕급 정도 되어야 구라가 구라가 아니게 된다. 그러니, 어서들 힘을 가지시게...
▶ 장릉
장릉은 능이니까 능이란 게 나중에 만들어졌을 거고. 그럼 단종은 어디서 세상을 떴을까? 앞에서 홍수가 나서 거초를 관풍헌으로 옮겼다고 하니, 거기서 승하하셨나 보다. 나이 만 16세에 죽다! 참, 어린 나이다. 죽은 단종의 시신을 엄흥도가 수습하여 산자락에 묻었는데, 중종 때 영월 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서 묘역을 만들었다고 한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 묘를 찾아낸 박충원 등을 기리는 정려비와 기적비, 사당 등이 있다는데, 그게 다른 왕릉에는 없다고 한다. 숙종 24년에 능을 장릉이라고 했다는 것도 그냥 알아두면 된다. 그저, 짧게 생애를 마감한 어린 왕을 기리는 게 장릉이라는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그렇다고 거기 가본다고 슬프거나 회한이 들까. 가보니, 여기도 가을이 왔다 가는 중이다. 예고도 없이 왔다가, 기약도 없이 가겠군.
이곳 장릉만이 아니라 다른 왕릉에 가본다고, 지난 역사가 얼마나 애달프겠냐마는, 그럼에도 사람들이 많이들 오간다. 왕이 묻힌 능이 이렇게 지자체 특별상품이 될 것이라곤 단종이 예측했겠는가만은, 영월은 단종 때문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래서 영월에 단종이 없어도, 영월은 영월이지만, 단종 때문에 생각해 보니, 더 영월 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