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걷는 시간’이란 노래를 들으며 밀퍼드(Milford)를 떠올린다. 기억을 더듬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시간이 기억을 걷는 것일까! 지나온 시간을 돌이킬 수 없지만 지나간 시간을 기억할 수 있다. 이때 조각난 기억들을 하나하나 이어 붙여 다시 그날로 돌아가는 마법이 펼쳐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마다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잊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하나둘씩 있듯이 내게도 밀퍼드는 넬(Nell)의 노래만큼이나 의미가 깊으며 잊고 싶지 않다. 되돌아갈 수만 있으면 밀퍼드 '그날'로 가고 싶다.
그때는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중년의 버거움, 이런저런 갈등을 겪으며 지낼 즘에 문득 내 인생에 대해 단 한 번도 나 스스로 칭찬을 해준 기억이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유야 어떻든지 이 나이까지 인생의 반려자, 끝까지 내 편이 될 것이라고 믿어지는 대상을 만들지 못하고 지내왔다. 더불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예상하지 못했던 어려움과 시련, 뭔가 허전해지기 시작하는 연령이 주는 무게감이 나뿐만 아니라 우리 세대 대부분이 겪는 성장통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보낸 것 같다. 개인 내적이나 외적으로 오는 시련을 마주하며 이런 과정을 보다 ‘성숙’ 일 것이라고 깨닫고 나서야 부랴부랴 괘도를 바로잡기 시작했다. 그 방편의 하나였다. 밀포드 트레킹을 떠나기로 한 것은. 뭔가 잘못된 듯한 아니 어긋나기 시작했지만 결코 실패는 아닐 것이라는 믿음과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에 대해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여기까지 해온 것도 잘한 것이라고.
굳이 따지면 개개인의 인생에서 실패라는 것이 있을까, 그냥 사는 것 아닐까. 잘 된 사람이 있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이고. 이때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누구나 비슷비슷한 삶을 사는 것 아닐까? 살다 보면 누구나 겪는 어려움들을 회피하지 않고 그때야 제대로 보려고 했다. 그때부터라도 바로 보고 싶었다. 그래서 떠난 밀퍼드 트래킹.
그땐 그랬다는 기억의 저편, 개인적인 쓰라린 기억에서 자연이 줄 수 있는 그 벅찬 환희까지 포함해서 5년 전의 기억을 깨워낸 것은 친구가 SNS로 보내온 파일 하나였다. 연필로 그린 맥키넌 패스(Mackinnon pass) 기념비 그림. 그래 맥키넌 패스. 거기서 사진을 찍으면 사진 대부분이 인생 사진이 되는 곳. 그림을 그린 친구와 그날 그 시각 난 그곳에 있었다. 그때 그곳에서 맞이한 눈이 시린 파란 하늘은 그 전날 비가 많이 내린 덕분이라고 한다면 그곳의 풍광과 청량함을 모욕하는 말일 것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비가 오더라도 일시 하늘이 맑아지다 다시 오염물질이 시야를 가리고 하늘 성층권에까지 대기오염띠를 짙게 드리워진 하늘과 그곳에서 느낀 하늘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닐까!
살아가면서 굳이 성공한 사람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을 얘기한다면 누군가에 의해 '기록'되거나 '기억'되는 것 아닐까 한다. 지나온 흔적들을 후대의 누군가를 시간을 거슬러올라 기억한다면 아마도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 퀸틴 맥키넌(Quintin MacKinnon)도 그런 사람인 듯하다. 뉴질랜드 남섬 피오르드 국립공원에 있는 테아나우 호수(Lake TeAnau)와 아서 밸리(Arthur Valley) 사이 1,154미터 정상에 있는 기념탑(Memorial) 주인공 말이다. 평상시에 기억할 필요가 없지만 그곳에 가면 기록이 되어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곳 맥키넌 패스도 1888년 맥키넌과 그의 동료 어네스트 미첼(Ernest Mitchell)에 의해서 '처음' 발견되었기에 기록되어 후대에 기억되는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살아가는 방법이 이런 방법일 것이다.
밀퍼드는 그런 곳이다. 인생 사진 하나쯤 남기고 싶거나 너무나 유명해서 여기는 한 번쯤 가보고 싶거나 등산을 자신하는 사람들이 앨범 한 편을 장식할 사진이 필요하거나 어느 날 문득 떠나고 싶은데 경제적 여유가 되거나 할 때 떠날만한 곳이다. 일 년에 아무 때나 갈 수 없지만 사는 게 지치거나 쉬고 싶거나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간다면 더욱 좋은 곳이 될 것이다.
맥키넌 패스는 가이드 트레킹을 할 경우 3일 차에 지나가는 곳이다. 밀퍼드 트레킹의 하이라이트라고 부른다면 아마도 이곳을 꼽을 것이다. 이곳을 올라가기 위해 지그재그 길을 걸어야 한다. 그리 높은 곳은 아닌 듯하지만 배낭을 가볍게 하지 않았다면 중간에 몇 번 쉬어야 한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멋진 풍광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어느 산 어느 곳이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 같다. 힘들고 지쳐서 도착했을 때 달콤한 코코아를 준비해 주던 가이드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 이곳에서 적어도 하루 정도 숙박하면서 마음을 정비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하기도 하고 다음 숙소를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도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남들과 비교해서 아주 맑고 멋진 날씨를 맞이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이유는 충분했다. 남들이 험난한 날씨에도 행복하게 기록을 남긴 맥키넌 패스에 대한 내용을 블로그에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맥키넌 패스에 도착하기까지 느꼈던 배낭을 더 가볍게 할 걸 같은 후회는 우리 인생에서 불필요한 듯하다. 후회 없는 인생이 없듯이 때로는 후회가 사치가 되는 것처럼 우리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걸어야 할 것이다. 밀퍼드 트레킹과 맥키넌 패스에서 느꼈던 감흥을 똑같이 느낄 수 없겠지만 살아가면서 조금 마음을 연다면 어디든 멋진 풍경과 사람들이 함께 하지 않을까!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더 많을 듯하지만 멈추면 또한 이제 더 갈 곳이 없을 수 있기에 멈추지 말고 좀 더 가서 기록하고 기억되게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