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비가 온다. 여행 떠날 때 비 온다는 소식이 없었는데. 뭐, 이것도 여행의 묘미다. 비라. 비 오는 날 풍경이란 게 비록 여름이라도 모든 게 달라 보이게 하지 않던가. 내리쬐는 뜨거운 땡볕보다, 비 와서 습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비 오는 날 운치도 있으니. 그런데 강원도에서 비라니. 비를 기대하지 않았건만.
강원도가 아니라도 물안개 오르는 산이야 흔하게 보지만 때로는 물 안갯속 산이 더 신비하게 보인다. 구름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등산객들 입장에선 당연히 아쉬운 게 우중산행이지만. 이런 분위기를 예상한 것이 아닌데, 환선굴이 있다는 덕항산이 오늘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비는 오고 우산을 써서 산 정상을 쳐다보는 것도 어렵지만 구름인지 물안개인지 가려서 어디까지가 정상 부근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덕항산 높이가 얼마 된다고 해발 840m 높이에 굴이 있을까? 그것도 동양 최대의 굴이다. 찾아보니 덕항산의 높이는 1072.9m. 비가 와서 역시나 산세가 보일락 말락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은 좋은데, 중요한 것은 덕항산 일대가 대이동굴지대이다. 동굴 지대? 이 때문에 이곳이 천연기념물 제178호인 건지, 환선굴이 천연기념물 제178호인 건지 아리송하다. 뭐 동굴이 많으니 대이동굴지대라고 하겠지. 이건 확실하다.
오늘은 산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굴에 가는데 그 굴이 산에 있다. 대부분 굴이 산에 있던가? 암튼, 그것도 높게.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일행이 뾰로통해있다. 많이 기다렸다나? 뭐 어쩌라고? 난 정상대로 본 것인데. 그것도 생각해 보니 이번에 굴을 처음 보았다. 우리나라 유명한 동굴이 뭐가 있더라? 단양 고수 동굴, 제주도 만장굴, 도심에 있는 광명 동굴 등. 그런데 가 본 기억이 없다. 처음 가본 동굴. 흥미진진했다. 이렇게 크다니? 비가 와서 그런가 동굴 안이 온통 물 천지다. 동굴 천장에서 쏟아지는 물부터 해서 폭포라고 이름 붙여진 장소까지. 바닥이 온통 미끈 미끈했지만 처음 볼 굴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누군가 말하길 종유석 등등이 다른 유명 동굴보다 아기자기하거나 멋있지는 않다고 하던데 뭐 다른 굴을 가봤어야 알지. 잘은 모르지만 그냥 느끼기에도 규모만큼은 엄청났다. 주차장에서 내려 굴까지 올라가는데 모노레일을 타고 가는 것도 신기했고, 초행길이라서 더 관심이 많았지만 올라가다 너와집도 봤다. 그런데 그건 전시용 같았다. 화장실도 너와집이었나? 요즘은 너와 만들 재료가 부족해서 너와집이 거의 없다는데 아, 어딘가 차 타고 지나가다 지자체에서 전시용으로 만들어 놓은 너와집들을 분명히 봤다. 그런데 어디더라?
그러고 보니 올라오다 굴피집도 봤다. 굴피집? 지붕의 측면으로 출입한다나! 이 건물이 국가 민속문화재라는데 독특했고 신기했다. 음식점으로 활용되는데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다. 어딘가 근처에 통방아도 있다는데 그게 어디 있다는 것인지. 제대로 알고 온 것이 아니니. 그저 주마간산이다.
덕항산 보다 환선굴이 워낙 유명해서 덕항산이 산으로써 자존심이 상할 만 한데 산세가 수려하다고 하니 다음에 한 번 기약해야겠다. 그저 오늘은 역시나 구름에 가려 보일 듯 말 듯 여기서 아쉬운 맘을 멈춰야겠다. 옆에서 누가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라고 계속 떠드는데, 그러고 보니 환선굴 올라가는 왼편 냇가 이름이 무릉천이다. 그냥 붙이면 되는 이름이 '무릉'이란 단어인가? 이 천이 흘러 오십천으로 합쳐진다는데, 그러고 보니 계곡이 예쁘다.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무릉천? 그냥 동네에 흐르는 개천이 아니다. 뭐야 이거. 개천에도 급이 있나?
무릉천보다 오늘은 굴에 간다는 마음으로 설렌다. 그것도 모노레일 타고 간다. 뭐, 걸어서도 갈 수 있는데 비 때문은 아니지만 다들 모노레일을 탄다. 산이야 다음에 오르면 되니 다음에 하고. 원래 계획에는 대금굴도 오늘 하루같이 보는 것인데 휴가철이라서 그런 지 한 달 전에 예약이 끝났다. 그러면 관음굴은? 영구적으로 폐쇄한 굴이라고 한다. 아쉽다. 뭐, 지질학적인 측면에서는 귀하겠지만 시각적으로는 별로니까 개방을 안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환선굴, 대금굴, 관음굴 기타 등등 지리적으로 대이리란 곳이 결코 그저 흔한 강원도 산골짜기가 아니다. 옛날엔 삼척도 오지였겠지만 그중에서도 오지였다는 이곳 대이리가 수억 년의 비밀을 누구에게나 보여주는 관광지가 되었다. 관광지라? 그러고 보니 관광지라서 꼭 나쁜 것은 아닌 것 같다. 누구나 찾아와서 즐길 수 있는, 밖은 뜨거운 태양 아래 30도를 넘나들겠지만, 굴은 평균 섭씨 15도라나. 그러고 보니 굴을 둘러 보는 내내 시원한 느낌이다. 오다가 굴이 추우니 비옷을 사라던 장사꾼이 생각난다. 그렇지 꾼이었다. 이 정도면. 이번 여행에서 환선굴을 추천 한 선배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해야겠다.
이 근처 굴들이 5억 3천만 년 전 생성된 것이라는데 그중에서 환선굴은 굴의 길이가 총 6.5km, 높이 30m, 폭 100m 다. 아, 그런데 내가 걸은 길이가 총 6.5km였던가? 아무래도 아닌 듯한데 그래서 찾아보니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구간이 1.6km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관람 시간이 많이 걸렸을까? 갸우뚱해진다. 아마, 굴이 처음이라 이것저것 볼게 많아서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겠지. 굴 내부를 어떻게 표현하지? 웅장, 거대, 시원, 감동 등등. 굴은 전체적으로 관람객을 위해 안내가 잘 되어있다. 굴을 세부적으로 군데군데 구분도 잘해놨다. 이참에 다른 굴도 기회가 되면 기꺼이 가봐야겠다.
나름 볼 만큼 봤다고 밖으로 나오니 배가 출출하다. 그래서 인근 식당에서 더덕구이 정식으로 때우고 그렇게 갈망하던 바닷가로 향했다. 그것도 비 오는 날 바닷가. 여름 땡볕 바닷가보다 얼마나 좋을까. 가슴이 기대감으로 설렌다. 해수욕을 그리 즐기지 않지만 더구나 땡볕 바닷가 생각만 해도 덥다. 반주로 한잔한 옥수수 막걸리가 기분을 좋게 업(up) 시켜준다. 약간의 알코올과 비 오는 날 운전과 바다를 본다는 설렘.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춰도 좋을 듯하다.
▶ 동해 바닷가, 장호항에서 맹방해수욕장까지...
장호항이 한국의 나폴리라고? 어디 어디의 어디?라고 하면 대부분 뻥인데. 나폴리를 가보지 않았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오리지널이 좋지 않던가. 나중에 나폴리는 꼭 가보고 싶다. 그러고 보니 갈 곳이 너무 많다. 그런 장호항에 도착하니 비가 어느 정도 그쳤다. 뭐 스노클링의 명소라는데 재미는 있겠지만 몸을 담그고 난 후 사워도 해야 하고. 귀찮은데 하던 찰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어촌계에서 문을 닫았단다. 스노클링을 할 수 없다는 말인데 뭐 아쉽지 않다. 애초에 스노클링 할 생각이 없었으니. 방파제에 올라 바라보니 해수욕장과 항구가 분리되어 있다. 날씨가 안 좋으니 해수욕을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대부분 바닷가 바위 전망대 길에 몰려 있다.
뭐, 줄 서서 기념사진 한 장 남기려나. 오른편 얕은 산 위에 삼척 해상 케이블카 타는 곳도 있고. 혹시나 케이블카 타볼까 올라갔더니 이런 1시간 이상 대기다. 뭐, 반대편에서도 사정이 마찬가지라는데 왕복 2시간 대기? 그럴 수 없지. 그러다 발견한 전망대! 오호, 케이블 카보다 전망대가 죽인다. 다 내려다보이는데? 케이블카를 연결하려니 당연히 인근 산에 건설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거기에 전망대라? 옥상이 전망대인데 그 전망이 정말 좋다.
갈남항이 어딘가 봤더니 바로 옆이 갈남항이고. 바닷가 스노클링 하는 바위 주변 풍광까지. 이럴 때 쓰는 표현. 대박!!! 좋다. 그것도 무료. 시원했다. 하늘에는 비구름이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이런 경치가 좋지 않던가. 특히, 전망대에서 계단을 만들어서 더 좋게 올라가게 만들어놨다. 그것도 유리로. 와, 더 좋네. 사진 찍는다고 기다리는 약간의 수고만 한다면야. 비 그친 바닷가. 비록 높은 파도라서 해수욕하기는 글렀지만 애초에 해수욕할 계획도 없었으니.
그냥 에릭 클랩튼의 원풀 투나잇이 생각난다. 아니지. 원더풀 투데이다. 오다 차 안에서 들었던 원더풀 투나잇이 귓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렇게 나폴리 아니지 장호항을 아쉬움과 함께 바람에 날리고 옆 갈남항으로 갔다. 누군가 갈남항이 장호항보다 스노클링 하기가 더 좋다는데 그건 모르겠고 작은 어촌 옆 방파제 왼편으로 펼쳐진 바닷가가 아담하다. 멀리 삼척 해상 케이블카 건물도 보이고. 그 건물 전망대에서 이쪽을 봤을 때의 모습과 다른 시선이란 게... 그렇다. 이게 여행의 목적일 수 있다. 평상시와 다른 풍경뿐만 아니라 다른 시각과 관점에서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 아니던가.
너무 나갔다고? 기껏 한 번의 여행으로??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케이블카 건물 옥상에 마련되어 있는 전망대 그 위에서 바라본 갈남항과 직접 갈남항에서 바라본 삼척 케이블카 건물과 그쪽 방향 바닷가 모습이란 당연히 다르지만 이 다름을 때대로 잊고 사는 게 아니었는지. 그나저나 갈남항은 아기자기하다. 생각해 보니 스노클링만 한다면 이쪽이 더 좋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데 처음엔 이 항구 이름인 갈남항을 길남항으로 알았다.
크크 뭐 갈남항이건 길남항이건 제대로 찾아왔으니 이름이 뭐가 중요할까 할 수도 있지만.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나왔다. 케이블카 건물 전망대에서 옆에 있던 사람한테 길남항이 어디 있는지 물었었다. 그분이 열심히 인터넷으로 길남항(?)을 찾아주면서 저기 있다고 가르쳐 주었었는데 분명 그분도 길남항으로 인터넷을 검색했었다. 다 그런 거지 뭐.
길남항! 아니 갈남항. 그 항에 무사히 도착해서 본 항구는 별 볼 일 없었지만 길게 늘어선 방판제와 옆 해수욕장(?)은 예뻤다. 어느 한 장면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아마, 날씨 탓일 텐데. 사진작가 두 사람이 어느 한편을 계속 주시하면서 사진을 찍는데 그쪽에 대체 뭐가 있다고 해서 보니. 그냥 바닷가?? 크크. 갈남항 방파제 끝에 있는 빨간 등대 그리고 그 분위기가 주는 아우라가 멋진데 갑자기 드는 생각. 왜 등대는 다 빨간색일까? 아니다. 빨간색 아니면 흰색. 왜 그럴까?
이게 해수욕장이다. 이런 것을 해수욕장이라고 해야지.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해수욕장은? 모른다. 그런데 여기도 만만하지 않다. 저 멀리 동해항까지 연결돼서 그런지 여기가 가장 긴 모래사장을 낀 곳인 듯하다. 뭐 그게 중요하겠냐마는 더 중요한 것은 맹방해수욕장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입구에 차박하는 야영지도 따로 되어 있고. 제법 차들도 많이 모여 있다. 그런데 정작 해변엔 사람이 없네. 날씨 탓인가! 그래도 땡볕 바닷가가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사실, 이곳에 들른 이유는 따로 있다. 덕봉산 생태탐방로를 걷고 싶었다. 다음 날 그러니까 내일 정동 심곡 바다 부채길을 걷고 싶었는데. 인생 누가 알겠는가. 오늘 여기에 온 것이 한 수였다. 신의 한 수라고 하기에는 과장인 듯하지만 다음 날 그 바다 부채길을 걷지 못했다. 이런, 낭패였다. 세상에. 파도가 세서 일부 구간 길이 무너 졌다나? 반대편 길은 개방한 듯 가려했는데 그쪽도 파도가 높아 출입을 막았다나! 이런 결국 결론은 오늘 생태탐방로를 걸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던지. 물론 숙제는 남겨졌지만. 원래 숙제란 제때하는게 아니잖은가!
아, 맹방해수욕장 쪽 탐방로와 바다, 바람, 파도가 주는 앙상블이 장난이 아니다. 어차피 휴가 떠날 때 즐거운 마음이었으니 모든 게 다 즐거웠겠지만 기대 밖으로 아름답다. 거기에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바다 색깔이 서로 아우성이다. 섞이길 싫은데 섞여야만 하는 것처럼 파도는 높고 바다 색깔은 혼돈 그 자체고. 이래서 비 오는 날 바닷가 그것도 민물이 유입되는 곳 바닷가는 그저 환상이다. 물에 몸을 담근 단 한 명도 찾지 못했지만 뭐 어떠랴.
이런 날씨에 이런 파도에 해수욕?? 그저 눈 만으로도 족하다. 오늘 그저 따봉이다. 매일 바다를 보면서 사는 사람들이야 그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지만 어쩌다 바다를 찾는 시골 촌뜨기 같은 나야 그저 이런 하루 보낼 수 있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마음을 열고 살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겠지만 속물인 내가 어디 그리 쉽게 세상을 배우던가. 그래서 여행이 필요한 지 모르겠다. 떠남으로써 비로소 돌아감을 알겠지만, 비록 시간이 지나면 이 느낌 또한 빗 바랜 기억이 될지라도, 원래 어리석으니 당연히 다음에 또 떠나겠지. 그래도 좋다. 오늘 같은 이런 느낌을 얻기 위해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vUSzL2leaFM&ab_channel=WarnerRecordsVau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