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집이다. 매일 아침 수도관은 거품이 이는 새로운 감정들을 나르고, 하수구는 말다툼을 씻어 내리고, 환한 창문은 활짝 열려 새로이 다진 선의의 싱그러운 공기를 받아들인다. 사랑은 흔들리지 않는 토대와 무너지지 않는 천장으로 된 집이다. 그에게도 한때 그런 집이 있었다, 그것이 무너지끼 전까지는." 얀 마텔(2017). p. 35
'부모님이 살았던'... 이 이상의 어떤 이유가 필요할까? 부모님이 나고 자라고 돌아가시고 묻히는 곳. 별로 특별하지 않은 소소한 일상이 기억될 때마다, 이 기억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긴가민가 하겠지만, 그 연장선에서 기억을 작은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그래서 방문한 산성시장. 전통시장 내지 재래시장이라 불리는 곳. 별로 특별할 것 없는, 닭강정, 반줄김밥, 잔치국수, 호떡 등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이제 이곳의 대표 음식이 된 곳. 이것도 다 인터넷 세상 덕분이지만 이런 세간의 평가가 아무리 훌륭해도 추석이나 설 때 부모님과 함께 차례상 재물을 준비하던 추억, 어머니 사별 후 점점 여위어가는 아버지와 함께 장날 이곳저곳 단골집 주인장들과 나누던 대화를 넘어서는 가치 있는 기억이 얼마나 될까!
얀 마텔(2004)이 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던 '파이 이야기'를 볼 때 처음에 무슨 내용인지 잘 몰랐다. 아마 기억이 맞는다면 3D로 본 최초의 영화일 것이다. 신기함에 빠져 모르는 것도 아는체하고 미처 깨닫지 못한 것도 그냥 넘어갔을 듯한 당시 기억. 심오한 내용이라 책으로 읽었으면 좋았을까? 결과적으로 이 책보다 먼저 읽은 책은 자주 가는 중고책방에서 제목이 독특해서 눈에 확 띄었던 포르투갈의 높은 산(The high mountains of Portugal, 2017)이다. 얀 마텔이 '파이 이야기'를 썼다고 해서 주저 없이 골랐던 책. 좋은 책을 구분하는 공력이 부족하니 남의 평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읽고 난 생각, 세간의 평가가 틀리지 않았다. 좋았다... 세 가지 이야기 속의 세 남자가 다 다른 남자지만 내용은 다 연결된다. 그래서 이 책이 뛰어난 걸까?
언젠가 공주가 예를 중시하는 곳이라서 유림들이 철도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대전보다 개발이 늦어졌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정말 그랬을까?? 공주는 금강을 통해 군산이나 강경과 수많은 배로 교역이 이뤄져서 이 일대에 많은 시장들이 개설되었는데 18세기에는 무려 14개의 시장이 개설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된 배경은 역시 강이다. 공주에서 배를 타고 부여까지 가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했었는데 예전에는 정말 배가 운행을 했나 보다. 당시에 군산에서 세종시에 있는 부강까지 수심이 깊어 물자를 수송했다고 하니. 1900년대에는 금강을 다니는 배가 연간 1만 5천 척이었다는데 이것은 어디까지 철도와 도로가 발달하기 전까지 그랬다는 것이다. 금강에 있던 포구 주변에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되니 시장이 발달할 수밖에 그래서 18세기 기록인 《동국문헌비고》(1770)에는 14개의 장이 섰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시대부터 교통의 중심이 육로로 바뀌고 1905년 경부선, 1914년 호남선이 공주가 아닌 대전을 경유하게 되면서 유통의 흐름이 변한 것인데, 유림이 반대해서 대전을 경유한 철도건설을 한 게 아니고 철저하게 일제가 기존 상권의 저항이나 보상 없이 물류를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1932년에는 충청남도 도청소재지가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지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공주의 상권이 쇠락하면서도 공주장의 상권이 바로 산성시장에서 명맥이 이어진 것이다.
"엄청난 고통과 비탄에 빠진 세 남자가 영혼의 안식처인 '집'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연작소설 형식으로 그린" 작품이라는데, 제목이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라니? 첫 번째 남자 토마스는 일주일 만에 아버지,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겪고 절망감과 분도로 신을 향한 복수를 다짐하며 높은 산으로 먼 길을 떠난다. 부검 병리학자인 두 번째 남자는 아내의 부재 이후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는데 어느 날 자기 남편을 부검해달라는 여인을 만난다. 그 여인은 부검을 통해 남편이 왜 죽었느냐가 아니라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려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세 번째는 40년을 함께한 아내의 죽음으로 큰 슬픔에 빠진 남자가 침팬지 오도와 함께 부모님의 고향인 포르투갈 북부의 고향 마을 투이젤루에 정착한다. 오도가 바라는 자유의 열망을 읽고 오도를 보내면서 본인도 이곳 안식처에서 자기의 생을 마감한다.
이 책의 서평에서 '파이 이야기'보다 더 풍부한 은유와 상징, 마술적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는 환상적이면서 정교한 서사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던데, 이런 평가는 '파이 이야기'를 읽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머릿속에서 인간에게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이고,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등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세 가지 이야기 속의 세 남자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마치 하나의 원처럼 연결되고 순환된다. 마치 불교의 인연설처럼.
그렇다면 공주 산성 시장이 '포르투갈의 높은 산'과 무슨 인연? 전혀 상관이 없는데... 소설에서는 인간의 근원적 물음을 끊임없이 되새기는 내용 속에서 세 번째 남자는 부모님의 고향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래 고향 때문이다. 지금 아버지와의 인연이 이어지는 이곳이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 아버지와 이어주는 인연의 끈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게 고향이 주는 의미 아닐까. 지금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사셨는지 기억하고 싶은 것처럼, 소설 속 두 번째 얘기에서 죽은 남자의 미망인이 자기 남편이 왜 죽었는지 부검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알려달라는 것처럼, 지금은 다행히도 아버지가 어떻게 사시는지 이곳 아버지의 고향에서 직접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평범한 공주 산성시장 한편에서 아버지와 함께한 기억들이 언젠가는 추억이 되고 이것이 나를 아버지와 연결해 줄 것으로 믿는다. 적어도 내가 살아있는 기간 동안엔. 포르투갈의 높은 산이 누군가의 고향이고 누군가의 안식처가 되듯이, 포르투갈과 정반대이고 너무 먼 이곳 산성시장에서 함께한 아버지와의 추억들이 내 마음의 고향이 되고 안식처가 되어 소설 속 주인공들 처럼 언젠가 맞이하게 될 상실의 아픔이 현실에서 벌어지더라도 더 이상 슬픔이 되지 않고 자양분이 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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