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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랜시스 하 Apr 15. 2024

이런 서른일곱이 될 줄은 몰랐어

출근길 아침마다 나는 내 존재의 누드를 마주한다.

"이런 서른일곱이 될 줄은 몰랐어. 정말이야" 출근길 내가 내게 말한다. 


광화문과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과 서울정부청사와 외교부 건물과 종로경찰서와 파이낸스 센터와 교보빌딩과 매일 지나치지만 이름조차 모르는 그 빌딩들 사이를 걸으며 나는 매일 변을 한다. 취조를 하고 자백을 한다. 그 아래엔 비참함이 깔려있다. 이렇게 아무것도 되지 못한 어른이 되어있을 줄 몰랐다고. 나는 그 길을 벌거벗고 간다. 국가의 유산과 마천루 사이에서 지푸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내 존재의 누드를 마주한다. 마치 부동산에 집 구하러 갈 때 나의 초라한 주머니가 낱낱이 까발려지듯이.


나는 시시한 사람이 되었어. 시시한 어른. 


그날이었다. 내가 Coursera의 미시간 주립대학교 시나리오 라이팅 강좌에 등록한 날은, 메모장에 “나는 시시한 사람이 되었어. 시시한 어른.”이라고 적었던 날. 월요일 밤 11시경이었다. 주말에 우연히 함께 소설 강좌를 듣는 동기에게 하버드를 포함한 아이비리그의 명문대가 온라인 강좌를 무료로 오픈해 누구든 들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나는 무슨 바람이 난 건지 David Wheeler 교수의 Write a feature length screenplay 1강을 듣고 있었다. 


“You will learn by doing.” 으로 시작하는 4분여간의 첫 강의에서 턱수염이 잘 어울리는, 늘씬한 백인 할아버지 교수는 카리스마 있었고, 진지했다. 이 수업을 듣는 이들의 행위를 진지하게 여기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미국에 있고 나는 한국에 있다. 그는 나를 모른다. 하지만 이 일면식 없는 미시간대학교의 시나리오를 가르치는 교수가 나를 진지하게 여겨준다는 것이, 서울에서 밤 11시에 온라인 강의실의 문을 여는 내게 이 수업은 110페이지 분량의 시나리오를 마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창작 과정을 여러 요소로 나누는 법을 배우고 세련되고 프레젠테이션에 바로 사용할 수 있는 대본을 만들 수 있는 구조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한 마디 한마디 말해준다는 사실이 퍽 위안이었다.


나의 동력은 비참함이었는데 이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 뭘 하고 있을까.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수업 끝에 2월 26일, 나와 같은 날 수업을 시작한 이들의 토론방에 들어갔더니 Writing group의 멤버를 찾는다는 댓글이 100여 개 정도 올라와있었다. 스페인, 멕시코, 이태리, 프랑스, 미국, 아랍 등등 국적도 다양했다. 이 사람들, 세계 각지에서 글을 써보겠다고, 여기를 이렇게 찾아왔구나. 글을 써 보겠다고. 나의 동력은 비참함이었는데 이들에겐 어떤 사연이 있을까. 뭘 하고 있을까.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나는 유대를 느꼈다. 그리고 왠지 다른 나라에서 글 동기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는 설렘에 휩싸였다. 내 가슴은 두근댔다. 살아있는 것 같았다. 하루 중 유일하게 숨이 쉬어지는 순간이었다. 사방이 시멘트로 뒤덮인 폐허에 나비가 날아든 것처럼 속이 나풀거렸다.


며칠 후 다음 강의를 들으러 접속해 보니, 몇 단계 과제를 완료해야만 다음 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첫 과제는 내가 만들고 싶은 피처 필름의 아이디어를 ‘무엇이든' 적어보는 것이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일단 생각나는 대로 첫 문장을 적었다. 첫 문장만 적었다. 


Title: Sagan and me 

사강과 나


Idea:

Françoise Sagan, Romain Gary, Ryunosuke Akutagawa, Yi Sang, Jeon Hye-rin... All of my favorite authors were unhappy, met tragic ends, and only one among them did not commit suicide.


"프랑수아즈 사강, 로맹 가리, 아쿠다가와 류노스케, 이상, 전혜린...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 모두 불행했고 불행하게 생을 마감했고 이들 중 단 한 명만이 자살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내 과제에 댓글이 두 개 달려있었다. 


Es interesante y me intriga. Podríamos obtener más argumento tal vez sobre la circunstancia de vida de cada autor , lo cual lo encamina hacia el final. Creo que es interesante y hay mucho público para éste tema. 

by Elizabeth Romo


흥미롭고 흥미로워요. 어쩌면 우리는 각 저자의 삶의 상황에 대해 더 많은 논쟁을 벌일 수 있고, 그것이 그를 끝까지 이끌어 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흥미롭고 이 주제에 대한 청중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by  Elizabeth Romo


Interesting concept but it would be interesting to get a better understanding of how you plan to tell the story. Or perhaps you're suggesting that like Sagan "you" were unhappy etc. but still did not commit suicide. 

by DA


흥미로운 컨셉이지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당신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입니다. 혹은 사강처럼 “당신"이 불행했지만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전개할 수도 있을 것이예요. 

by DA


알고 보니 시놉시스를 쓰는 과제였고, 나는 단 한 문장만을 썼기에 피드백을 하기엔 기준 미달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당연히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을 줄 알았는데, 두 명이 내 글(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첫 문장을 읽고 또 흥미롭다는 답변을, 혹은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안해 준 것이다. 물론 과제의 일부였겠지만 그럼에도 가슴을 떨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쓰면. 보고. 반응이. 오는구나. 


아직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단지 첫 문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한 줄, 다음엔 두 줄, 다음엔 세 줄…. 기약할 수 없는 짓을 밀고 나아갈 때 무슨 일이든 생긴다. 내게는 단 두 명의 독자와 그들의 목소리만 해도 상당히 흥미롭고 신기한 ‘사건’이었다. 첫 수업을 듣던 날 한 번, 그리고 이 댓글을 봤던 날 또 한 번, 나는 내가 좀 좋았고, 떳떳했다. 다음 출근길 스스로 취조할 때 ‘그래도, 이건 좋았잖아, 음. 이런 순간은 괜찮았어, 꽤.’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의 일부가 자라난 느낌.


나는 매일 출근길에 또다시 비참할 것이다. 그리고 어느 밤 또다시 강의실 문을 열고 나를 나 이상으로 내 가벼운 몸짓을 그 이상으로 진지하게 여겨주는 그 목소리에 위안을 얻고 글을 쓰려는 이들을 모니터 너머로 바라보며 숨이 쉬어진다고 얘기할 것이다. 그러다 끝내, 이런 게 나라고 인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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