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장님, 제 집에 사시니 어떠신가요?”
나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월세를 살면서,
동시에 월세를 받고 있는 집주인이다.
아침이면 습관처럼 발코니로 나간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 한 잔을 손에 쥔 채, 정면의 통유리 너머를 가만히 응시한다.
아침 햇살을 조각조각 반사하며 눈부시게 산란하는 저 럭셔리 아파트 한 채.
그 화려한 창 안에는 내가 모시는 회사의 법인장님이 머물고 계신다.
그리고 매달, 그분의 이름이 찍힌 숫자들이 꼬박꼬박 내 통장의 빈칸을 묵직하게 채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안락한 관사일 그 공간이,
실은 낯선 땅 독일에서 맨손으로 일궈낸 나의 가장 견고하고도 정직한 결실이다.
사람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묻곤 한다.
“독일에 아파트를 8채나 가진 대기업 부장이, 대체 왜 남의 집에서 월세를 내며 사느냐” 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저 소리 없이 웃고 만다.
그 질문 뒤에 엉켜있는 30년의 긴 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내야 할지 몰라서.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딸기밭을 누리던 스무 살의 이방인이,
어떻게 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소유한 전략가가 되었는지 설명하기엔,
아침 공기가 너무 짧기 때문이다.
1997년 여름,
나는 생전 처음 맡아보는 독일의 건조한 공기 속에 홀로 던져졌다.
낯선 땅이 주는 설렘에 취해있던 것도 잠시,
계절이 바뀌기도 전에 고국은 IMF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내려갔다.
아버지의 평생이 담긴 사업체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졌고,
치솟는 환율은 유학생인 나의 목을 조여왔다.
어느 날 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어머니의 목소리는 이미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그 축축한 울음이 국경을 넘어 내 가슴으로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그날 이후,
나의 삶은 수녀원의 좁은 방들을 전전하며 부유했다.
난민들과 한 지붕 아래 몸을 뉘었고,
보증금을 떼먹는 집주인의 서슬 퍼런 눈빛 앞에 무력하게 서 있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건, 멀리서 날아온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금지옥엽 키운 딸의 허름한 원룸을 마주하고,
차마 소리 내지 못해 입술을 깨물며 눈물 흘리던 그 표정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그때 나에게 ‘집’은 씻기지 않는 상처였다.
차가운 방바닥에서 몸을 웅크리며 나는 남몰래 다짐했다.
먼 훗날 내가 누군가의 집주인이 된다면,
내 집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만큼은 집이 상처가 아닌 '위로'가 되게 하겠다고.
그들의 고단한 하루를 품어줄 수 있는 단단한 벽이 되어주겠다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이제 나는 크리스마스가 오면 세입자의 문 앞에 작은 선물을 놓아둔다.
타국에서 홀로 고생하는 학생 세입자의 이삿날이면,
내 옛 모습이 떠올라 서툴게 김밥을 말아 운전대를 잡는다.
이것은 숫자로 증명해 낸 승리이자, 온기로 지켜낸 나의 삶이다.
월급쟁이의 한계를 부수기 위해 누구보다 독하게 나를 몰아붙였지만,
그 치열함의 끝에는 언제나 사람 냄새가 머물러야 한다고 믿었다.
이 기록은 단순히 아파트 개수를 늘려온 무용담이 아니다.
차가운 독일 땅에서 보석처럼 단단해져야 했던 한 이방인의 처절한 생존기이자,
지독하게 외로웠던 외노자가 세상에 건네는 가장 따뜻한 고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