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치발로 복도를 걷던 스무 살 의 나
독일에서 30년을 살며 내가 새로 쓴 '럭셔리'의 기준은 남들과 조금 다르다.
그것은 로고가 박힌 명품 가방도, 삼각별 외제차도 아니다.
나에게 가장 짜릿한 사치는, 오직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방 안에 딸린 화장실'을 갖는 것이다.
사람들은 나의 이 한마디에 으레 농담 섞인 미소를 짓지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나의 진실은 언제나 서늘하리만큼 진지했다.
한국에서의 유년 시절, 나는 3대가 모여 사는 커다란 한옥집의 품 안에서 자랐다.
마당은 늘 북적였고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지만, 그 울타리 안에서 '결핍'이라는 단어는 생소했다.
가족이라는 온기는 공기처럼 당연했고, 내 공간은 늘 안전했다.
그 안온함이 무너진 건 1997년, 홀로 독일 땅을 밟으면서였다.
입국 석 달 만에 터진 IMF는 내 인생의 지도를 통째로 불태웠다.
유학생의 낭만은 사치가 되었고, 내게 허락된 선택지는 도시의 가장 낮은 곳,
공동 화장실과 공동 부엌을 써야 하는 비좁은 공간뿐이었다.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를 들이면 숨 쉴 틈조차 없던 사각형의 감옥.
그곳에서 나는 생전 처음 보는 타인들과 생리적인 현상까지 공유해야 했다.
새벽녘, 누군가와 마주칠까 두려워 까치발로 복도를 지나 화장실 문고리를 잡던 그 비굴한 고요함.
그것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다.
나만의 온전한 공간을 향한 지독한 갈망은 그 어두운 복도에서 자라났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나일 수 있는 한 평의 공간.
그 간절함이 내 투자의 씨앗이었다.
첫 직장에 들어가 나만의 욕실이 딸린 작은 월세방을 얻던 날을 기억한다.
욕실 문을 잠그고 혼자 서 있던 그 찰나의 해방감.
차가운 타일 벽에 등을 기대고서야 비로소 나는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그때 결심했다.
내가 집을 산다면, 문을 닫는 순간 세상의 모든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성소를 만들겠노라고.
하루의 무게를 문밖에 부려두고, 비로소 오롯한 나로 돌아올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나의 재테크는 정교한 수익률 계산기가 아니라,
이름 없는 이방인의 사무친 결핍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공실률 0%를 기록하는 여덟 채의 집.
그 숫자들의 이면에는 여전히 까치발로 복도를 걷던 스무 살의 내가 서 있다.
나에게 럭셔리란,
언제든 마음 편히 문을 잠글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문 뒤의 공간이
온전히 나로 채워지는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