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유학생, 백악관의 돌로 지은 집을 사다.
집이 없는 사람은 안다.
집이란 단순히 비를 피하는 지붕이 아니라,
불안한 영혼이 비로소 땅에 발을 내딛는 자리라는 것을.
타국에서 맨발로 차가운 복도를 견디며 보낸 20년의 유랑 끝에,
나는 나를 온전히 품어줄 '하얀 요새'를 만났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살고 싶은 집 하나를 품고 산다.
나에게도 그런 집이 있었다.
자산 가치도, 투자 수익도 따지지 않은 채 그저 '내가 살고 싶어서' 선택했던 집.
하지만 돌이켜보니 나의 모든 투자와 선택은 바로 그 간절했던 집 한 채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에 온 뒤 20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내 집'에 살아본 적이 없었다.
오래된 수녀원의 좁은 방에서 시작해,
이라크 난민 가족의 먼지 쌓인 다락방,
가정폭력을 피해 도망친 파라과이 친구와 숨어 지내던 ‘여성의 집’(Frauenhaus),
그리고 이름 모를 이방인들의 월세방들까지.
나는 20년 동안 철저히 '남의 집'에 기생하며 살았다.
커리어를 위해 독일 남부로 파견되었을 때는 카라반에서 지내기도 했다.
좁고 흔들리는 그 고립된 공간에서 나는 지독하게 돈을 모으며 처음으로 일기에 적었다.
‘나도 이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내 집을 갖고 싶다.'
외국인이자 여성으로 독일 땅을 버텨내는 일은,
매 순간 보이지 않는 칼날 위를 걷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 동기들보다 3배 더 공부했고,
직장에서는 늘 가장 먼저 출근해 사무실 불을 켜는 사람이었다.
동료들은 나를 'First'라 불렀다.
아무도 없는 새벽의 적막을 깨고 불을 밝히는 사람.
그렇게 방 한 칸 없던 20년이 나를 만들었고, 나는 팀장이 되었다.
나는 오래된 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독일인들에게 천 년 된 집은 낭만일지 몰라도, 나에게 오래된 집은 '상처의 냄새'다.
밤에 한 걸음만 옮겨도 복도 전체에 비명처럼 울리던 수녀원의 나무 바닥.
“너무 시끄럽다"는 수녀님의 꾸중을 들은 날, 나는 신고 있던 실내화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날 이후 나는 소리를 죽이기 위해 그 서늘한 나무 바닥을 맨발로 걸어 다녀야 했다.
그래서 나의 첫 집은, 상처가 스며들 틈 없는 완벽한 '신축'이어야만 했다.
프랑크푸르트의 신도시 'Europa Allee'.
그곳엔 나를 기다린 듯 60미터 높이의 하얀 타워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미 백악관과 같은 재질인 크로아티아산 백석으로 감싼 외벽.
독일 건축디자인상까지 거머쥔 그 랜드마크가 나의 첫 요새가 되었다.
로비에서 정중히 인사하는 컨시어지를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65제곱미터의 아담한 집이었지만 나에게는 궁전보다 벅찼다.
발코니에 서면 축구장만 한 공원이 발아래 펼쳐지고,
세계 최대 규모의 박람회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 침실만큼 넓고 깨끗한 욕실은,
차가운 바닥을 맨발로 버텼던 지난날의 나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보상이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집값은 두 배 넘게 올랐다.
하지만 나에게 이 집은 숫자 그 이상의 증명이다.
20년의 떠돌이 생활을 위로받는 성소이자,
타국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선 '성공한 여성'이 되었다는 훈장이다.
비로소 나의 마음이 자리를 잡았다.
묵직한 현관문이 닫히며 세상의 소음을 '철컥' 끊어냈을 때,
그 완벽한 고요함 속에서 나는 원인 모를 눈물을 닦았다.
하얀 석재 벽면에서 배어 나오는 건조하고 깨끗한 냄새가 내 유랑의 얼룩을 씻어내주는 것 같았다.
바닥 난방을 타고 올라오는 은은한 온기가 맨발로 고생했던 나의 발바닥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포근함 속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자 60미터 높이의 하얀 타워는 서서히 흐릿해지고,
눅눅한 왁스 냄새와 소름 끼치도록 서늘한 발소리가 울리던 그곳...
20년 전 나의 첫 유랑 지였던 수녀원의 무거운 나무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 다음 편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