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관점을 방해하는 ‘자책’과 ‘비교’
지난번 글에서는 우리가 우리 삶을 충만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존재의 관점’으로 ‘관찰하는 마음 근육을 키우기’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실행 중심의 삶에서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개념이기도 하죠. 이러한 ‘관찰하는 마음의 근육 키우기’ 연습이 다름 아닌, 요즘 많이 회자되는 ‘마음 챙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음 챙김을 쉽게 해주는 도구가 명상이니 나에게 맞는 명상을 지속적으로 해보는 것도 마음의 근육 키우기에 좋겠죠?
오늘은 이 ‘관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존재로서의 나’를 바라볼 때, 우리를 방해하는 가장 큰 두 가지의 적인 ‘자책’과 ‘비교’를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자책과 비교는 우리 삶을 둘러싼 가정, 학교, 사회에서 끊임없이 완벽함을 요구받으며 우리 안에 단단히 박혀 있습니다. ‘자식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부모님의 교육을 향한 왜곡된 기대가 그렇고, ‘최고의 미래를 보장하는 최고의 대학으로!’라는 보이지 않는 사회의 캐치프레이즈가 그렇습니다. 그러한 요구 속에서 ‘나는 부족해’라는 self-talk은 우리의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있는 듯합니다. 아래는 대학생들이 자책과 비교를 왜 하게 되는지에 대해 논의하면서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나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책이라는
채찍질이 있어야 해이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내 삶을 발전시킬 수 있으니까….’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자책’을 하다니요… 이 무슨 자학적 행위인가요? 그동안 받았던 가정과 사회의 채찍질에 익숙해져서 나 자신마저 가세해야만 나의 성장과 발전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인가요? 여기에는 ‘자책과 비교가 나를 완벽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라는 ‘비합리적 전제’가 깔려있습니다. 게다가, 이 비합리적 전제는 경쟁사회에 사는 우리에게 자칫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자책과 비교가 나를 완벽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라는 전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비합리적입니다. 우선, ‘완벽해야 한다’라는 전제만으로도 허구적 추상성이 가득합니다. 실재적으로 얼마나 완벽해야 완벽한 것인지, 과연 그 완벽함이라는 것이 실재적으로 가능하긴 한 것인지 의문입니다. 백번 양보하여 실재적 완벽함이 있다고 쳐도 ‘비교’로 항상 남들에게 뒤쳐질까 두려움과 불안감에 휩싸여 ‘자책’이라는 채찍질로 나를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과연 그 완벽함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더 중요하게는 그런 삶에서 ‘행복’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를 둘러싼 사회문화적 맥락이 우리에게 자책과 비교를 하도록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자책과 비교가 너무나 당연시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평균적인 재능, 평균적인 성격, 평균적인 지능 등 ‘평균’이 ‘정상’으로 평가되는 평균의 시대에 살면서 우리는 남들에게 뒤쳐질까 두려워하며 평균적인 삶을 사는데 급급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삶 속에서 자기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 스스로도 모르며 그저 열심히 남들을 따라잡기 위해 애쓰며 살뿐입니다.
자책과 비교가 생기는 이유를 분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나의 내면에 생긴 비합리적 전제와 신념에 대해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결심입니다. 다음 레터에서는 비합리적 전제에 기반한 이 자책과 비교라는 인식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전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기 수용’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_프랭클린플래너 멘토. 이영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