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만큼 작가의 내면에 대한 해석이 다양하고 변형과 왜곡이 많은 경우를 찾아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것은 파격적이기도 한 그의 작품이 곰팡내를 푹푹 풍기는 인간 고독의 본연을 뿌리까지 더듬고 있기 때문이다.
벌레로 변신한 그의 방문을 어렵사리 열었던 스물의 그날, 나에겐, 사방이 거울로 덮인 미로 속을 벗어나는 것이 ‘카프카 알기’와 이음의 동어가 되어 버렸던 것 같다. 마치 그에게 조정당하는 것만 같았던 느낌은 이제, 누가 누구에게 조정당했던 것인지, 어쩌면 내가 그를 조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카프카 그를 본질로만 보려고 한다면, 어쩌면 그 자신도 답이란 것을 내놓을 수 없을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꿈에서 깨어난다. 평소와 달리 뭔가 어색함을 느낀다. 그때 침대에 누워있는 자기가 한 마리의 징그러운 벌레로 변신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 페이지를 펼쳤던 날 카프카는 벌레로 변신했다. 몇 번을 읽고, 세월에 적당히 숙성을 시켜보니 그때는 볼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어쩌면 그는 변신한 벌레가 자기 자신인지, 변신 전의 그레고르 잠자가 자신인지 혼동스러워했던 것 같다. 사실 그의 변신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어쩌면 처음부터 그러했을 수 있다는 것은, 또 다른 그의 작품 <시골의 혼례 준비>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가끔, 내가 커다란 딱정벌레나 풍뎅이의 모습을 한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그레고르는 왜 변신해야만 했을까. 5년 전 파산한 아버지가 자신이 일하는 가게 주인에게 빌린 빚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었을까. 가족의 빚을 갚으며 성실한 의류 외판원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한 날 모든 것이 변해버린다. 아니 변했다기보다는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배반은 변신에 따르는 현상일까. 배반은 언제든 몸을 똬린 뱀과 같이 혀를 날름대고 있었지만, 그레고르는 미처 인지 못했을 뿐일 수도 있다.
믿음직한 세일즈맨에 사랑받던 아들이자 듬직했던 오빠는 결국 가족의 변두리를 떠돌던 소외자였고 혐오스러운 벌레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가족의 정이란 것조차 언제나 그가 벌어오던 돈을 향하고 있었던 것임을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신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인간 원죄에 대한 벌로 인해 벌레로 변신해야만 했던 것일까. 아니면 시시포스처럼 절대자에 의해 판결된 무한의 형벌로부터 벗어나려는, 카프카 스스로에 의해 의도된 변신일까.
실존을 찾는 이는 언제나 흙먼지 날리고 덜컹이는 낯선 길을 걸어가야 하기 마련이다. 카프카에게 하나의 해석을 덧붙여야겠다. 이제야 무상함이라는 염세로 흐르던 영혼이 실존의 바람을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