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 그녀, 삶에서의 포지셔닝

전혜린 그녀, 삶에서의 포지셔닝



1.

잠이 오지 않는 밤의 어둠은 검은 레테의 강물 같다. 언젠간 꼭 한 번 서게 될 그 앞, 그 물의 결에 대해선 아직은 어떤 짐작조차 할 수 없으니 그날, 지난 것들에 고개 돌려야만 하는 미련을 어찌할지, 혹 갈대 울음 같은 강바람 소리에 눈물방울 맺지나 않을지, 창 밖 먼 불빛 하나를 응시한 눈빛이 혼자 반짝이는 변광성처럼 깜빡거린다.


한동안 그리고 오랫동안, 어쩌면 그녀의 삶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세상살이에서도 그리고 떠난 후에도, 세상과의 접점을 찾지 못한, 오히려 찾아지지 않은 것이 더 자유로워 보이는 한 여자, 에고의 고집쟁이이면서, 연초록 말간 숲 속을 흐르는 작은 개울물 같이 투명한 그녀, 커피 잔을 달각거리면서 전혜린에 대해 생각한다.


이십 대 초의 어느 날, 평소 작가와 책에 대한 얘기를 나누곤 하던 국문학과 후배가, 문득 던진 짧은 질문 한 문장이 그녀, 기억에 남겨진 전혜린과의 진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선배는 전혜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들은 적은 있지만, 어느 정도 알고는 있지만, 뭔가를 말해야만 하는데도 무언가를 말하기에 머뭇거려지던 그 순간, 머릿속에 불현듯 일어난 관심의 걸음은, 그녀 전혜린이 남긴 발자국을 바쁘게 쫓아가고 있었다.



2.

이십 대, 그녀에 대한 나의 판단은, 지금도 큰 차이 없지만, 복잡하고도 미묘했다. 먼저 사포나 상드 같은 혁신적 여성작가로서의 삶이나 모습을 기대하였지만 어느 곳에서도 하나의 방향을 찾기 어려웠다.

작품 자체로 접근하니, 문학적 완성도와 미학이 넘실대는 문장, 부조리한 극적 전개나 잘 짜인 구성 속에서의 상징 찾기 같이, 그 당시 나의 영혼을 빨아들였던 문학적 가치 속에서 그녀, 전혜린의 작품은, 어딘가 허술하지만 뭔가 만져질 듯한 아슬아슬한 반짝임을 지닌, 조금은 별스런, 그러면서도 아스라한 무엇이었다.


독일의 전후 문학 작품인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제목 삼은 그녀의 작품을 뒤적이며 남겨진 것 별로 없는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 책의 제목은 그녀의 상징이 된 듯했고, 혹시 하인리히 뵐 작품과 진한 연관성을 가진 작가가 아닐까 하고 여기게끔 하였다.

독일 뮌헨에서 유학 생활을 경험한 번역가로서의 그녀는 하인리히 뵐보단 헷세의 작품에 더 많은 영향을 받은 듯하였다.


그녀에 대한 평전이란 것은 그녀이기도 또한 결코 그녀일 수 없는 해석상의 그녀를 만들어낸 것 같아 보일 뿐이었다. 그저 실마리로 잡힌 작은 흔적들을 추측과 추론을 기반으로 엮은 것이 그것이니, 몇 가지 다른 꼭지를 단초 삼은 나의 감상적 행위 또한 그녀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당한 것이라 할 수 있게 된다.


왜 독일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선 그녀의 생활적 배경은 무시된다. 그녀를 알고 싶었던 그 시절의 나에겐, 어쩌면 그녀는, 아니 분명하게 그녀는 헷세를 따라서 독일로 떠난 것이었다. 적어도 나에게 그녀, 전혜린은 그랬어야만 했다. 그녀가 살아간 당시 너무나도 서구 중심적(western friendly)이라는 비평 속에 남긴 작은 흔적 하나하나가, 누가 뭐래도 유럽을 동경하던 나에겐 그 비평의 조각조차 그녀의 드레스를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었다.



3.

현실의 시간과 공간을 일상의 생활과 자신의 내면으로 이분한 후, 이 두 가지를 조율하는 법을 깨치지 못할 때 어떤 천재의 삶은(실제 그녀의 천재성에 대한 논란에 대해선 관심 없다) 비운의 강을 향해 걸어가게 된다.

분명 둘인 것이 하나에 뒤섞인 혼동 속에서, 결국 삶은, 스스로의 몫이라 여기고 비운의 강을 자신이 걸어 들어가야만 할 운명이라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삶의 한 모습인 생활에선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자리 확보하기’라 할 수 있는 포지셔닝 전략(positioning strategies)이 필요한 법이다. 안타깝게도 세상이란, 문학가에게도 아무런 전략 없이 살아가기에는 거칠고 험한 것이다.


이 전략은 천재 또는 고집 센 글쟁이에게 분명 더욱 절실한 것이지만 정작 그들에겐 관심 없는 남의 얘기처럼 들리기만 하니, 그들은 스스로가 세상을 향해 울타리를 높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적절한 자리잡기,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자리 하나쯤은 마련해야 한다. 그것을 세상과의 접점이라 부를 수 있다. 천재 또는 글쟁이는 결코 면(space)을 통해 면대면으로 세상에 붙여지지 않는다. 모서리(edge)의 일부분이거나 어느 꼭지 한 점(vetex) 정도만을 겨우 붙여서 그럭저럭 지내야 한다. 그래야 살아갈 수 있게 되다. 세상에 너무 잘하려 하면 안 된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세상과 너무 잘 붙어 지내려 해도 안된다. 그래야 숨쉬기 편하다.


그녀를 생각하다가 보니 괜히 중얼거리게 된다.

“나보다 앞선 세상, 저기쯤에서 불쑥 고개 내밀었던 작은 한 여자, 전혜린, 무채색의 젊은 계절로만 남겨진 그녀를 만나러 나가봐야겠다.”


인생은 진입 전략(entrance strategy) 따위는 요구하지 않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진입되는 것이 인생이다.

일단 진입된 인생은, 생활이란 이름으로 여기 어딘가에, 한 자리 비집어 끼어 살아가기 위한 포지셔닝 전략(positioning strategies) 익히기를 강요한다.


그럭저럭 살기와, 제대로 살기란 걸 구분하지 못하는 무지 속에서, 천재이든 글쟁이든, 어떻게든 살아도, 어떻게든 살아가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어쩌면 스스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출구전략(exit strategy) 일 것이다.


그녀 전혜린의 출구전략은 세상의 접점을 찾지 못한 천재 또는 한 글쟁이 여자가 선택한 극단의 인생 서술일 수 있다. 천재가 아니라도, 적어도 예인이길 바라는 조금 다른 영혼을 가진이들에겐, 잘 살아가기와 잘 익어가기, 그리고 제대로 떠나기 계획은 자신의 삶의 존재성에 대한 여린 자기 확신이 될 수 있다.

전혜린과 랭보, 노발리스, 카프카, 반짝임을 남기고 떠나간 작가들처럼 요절할 순 없지만, 인생이란 것이 어차피 범부의 삶과 조금 다른 곳에 눈높이를 둔 이들은, 그들만의 출구전략, 그 길고 아름다운 전략을 찾는 것이 좋겠다.

언젠가 헤르만 헷세가 가진 노년의 눈빛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지, 노발리스의 앳된 입술에서 흐르던 낭만을 노래하며 삶을 버티어 낼지, 카프카의 날카로운 눈빛으로 삶의 부조리를 헤쳐갈 수 있을지, 그렇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초 봄의 마냥 높아만 가는 햇살에 차오른 궁금증의 물기가 늦가을의 길어진 햇살에 바싹바싹 말라가길 기다린다.


오늘도 실존을 찾아가는 걸음은 혼돈과 체념이란 두 갈래 길에서 어리석게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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