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의 두통을 나누는 아침

살아 남은 자의 운명: 사색으로의 초대

랭보의 두통을 나누는 아침



1.

어느 날, 어린 랭보(Arthur Rimbaud | Jean Nicolas Arthur Rimbaud)가 숲 속에 난 길을 지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자기의 머리를 덩치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에 처박았다.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이마에 맺힌 핏방울을 걱정하는 친구에게 랭보는 말했다.

"나는 괜찮아. 이것은 생각하는 자가 걸어야 하는 가시밭길일 뿐이야."


그날 랭보가 걸어간 그 길이 자신의 작은 몸조차 이리저리 살피며 걸어야만 하는 좁은 오솔길이었는지 골목길이라 부를 만큼 작은 자유라도 주어진 길이었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걸음으로 그 길을 걸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사실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두 손을 주머니에 쑥 끼워 넣고 살짝 고개 숙인 채로 터덜터덜 걸어가는 랭보가 ‘길’이라 부르는 그곳에 자리 잡고 있으면 된다.


2.

잠이란 것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젯밤, 하지만 시간적으로 본다면 오늘 새벽에 마신 보르도의 검붉은 와인 때문인지 포도가 삼킨 따가운 햇살 때문인지, 벌써 희미해져 가는 간밤의 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벼운 두통에 무거워진 눈을 어렵사리 뜬다.


가벼운 증상이야 간혹 있어왔지만 지금껏 별 달리 두통이란 걸 겪지 않고 살아왔기에 지끈한 머리로 깨어난 오늘 아침은 느낌만이 아니라 마음까지 어색하다. 침대에 누워 아침 빛이 창을 뿌옇게 밝힐 때까지 조금 더 자리에서 뒤척인다. 어젯밤 미처 가려두지 않은 커튼이 창 옆에 밀려 숨어있다. 이제야 발바닥의 욱신거림을 머리가 알아차린다. 간 밤, 울창한 숲 속으로 난 꿈속의 좁은 길이 ‘생각하는 여행자가 가야 할 길’이었을까. 점점 짙어가는 아침의 상념을 진갈색의 홍차로 깨우는 것이 좋겠다.


3.

두통이란 건 아무리 가벼워도 신경을 날카롭게 하는 법이다. 여행 캐리어를 뒤져 타이레놀을 찾는다. 잠시 속이 쓰리다. 따뜻한 홍차 물에 그냥 삼킨 두통약 때문이라 여긴다. 아직 아침의 빈속이라 그럴 거야, 이제 곧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한다.


알 수 없는 두통의 원인이 궁금하다. 침대 머리의 작은 탁자에 얹어 둔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표지에선 젊고 잘생긴 랭보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침실의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머리를 제쳐 천장을 따라본다. 색 바랜 하얀색이 덧칠한 천장은 먹먹한 우주 같다. 그렇게 한참을 있자니 미지의 것을 향한 우주의 공전인 듯 어지럽게 돌아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 나의 두통의 원인을 랭보의 두통에서 찾아낸다. 오늘 아침 난 랭보의 두통을 나눈다.



4.

어느 날 랭보는 자신의 머리숱이 너무 많기 때문에 두통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에 난 털을 모두 밀어버린다. 이제 갓 수계한 비구니의 머리처럼 젊은 랭보의 머리는 하얀 종이를 둥글게 말아놓은 뭉치같이 파리했을 것이다. 그 치료법에 대해 의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 두통의 숙주인 랭보에겐 상당히 적절했던 처방이었음이 분명하다.


때론 자신의 주관이 분명한 객관의 진리가 되는 법이다. 그 순간 랭보가 자신에게 내린 주관적 처방은 분명 그의 두통을 객관적으로 덜어주었다고 믿는다. 믿음은 진리를 만드는 법이다. 속임수로 주어지는 약조차 피처방자의 믿음에 따라 큰 치료효과를 가질 수 있으니, 진실이란 것은 오직 인간의 마음 안에서만 찾아질 때도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감상적이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득했던 랭보에게 “자아가 만들어낸 위약”은 의사의 처방보다 더 큰 치료효과를 가졌을 것이다. 두통의 원인이란 게 결코 현실의 세계에 있지 않고 자신의 초현실적 감상안에 있었음을 랭보는 분명 알고 있었던 것 같다.


5.

서쪽으로 길게 드리웠던 아침 그림자의 키가 한 뼘씩 줄어들어가고 태양은 남쪽 하늘 위로 길게 돌아 머리 위 어디쯤에서 제 알아 자리 잡는다. 점차 밝아지고 있는 태양을 따라 두통이 가벼워진다. 가만히 보니 두통이란 것도 어떤 주기를 따르는 것 같다. 낮의 시간에는 빛의 주기를 따르는 것 같으니 밤의 시간이면 어둠의 주기를 따를 것 같다.


물리적이지 않은 두통의 원인을 때론 자신 안에서 찾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안 어딘가에 숨어 지내던 내면의 나는 때맞춘 다른 어떤 주기를 따르고 있고 그 주기가 나라고 불리는 현실의 나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숙소를 떠나지 않으려는 “이 나”는 나의 삶을 안주시키려는 나의 '정(thesis)'이고, 문손잡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그 나”는 길 떠남을 유혹하는 나의 '반(antithesis)'이다. 그렇다면 이 여행길에서 찾아야 할 것은 나의 '합(synthesis)'인 것일까.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이 두 개의 나에게 변증법의 현명한 타협을 가르칠 수 있을까.


살아가다 보면 어떠한 삶의 답도 결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마련이다. 어쩌면 오늘 아침의 가벼운 두통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그 답을 찾아보라는 랭보의 은밀한 조언일 수도 있겠다.


6.

젊은 날의 어느 날, 이발소를 찾아 머리를 빡빡 밀었다. '이 부 머리'라고 불리는 짧은 머리로 캠퍼스에 나타난 나에게 툭툭 던져졌던 언어들이 가끔 일벌의 날갯짓 소리처럼 윙 윙 울린다. 사실 그것들은 별 의미 없는 단어들이 책임 없는 목소리에 그냥 실린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속이 빈 구형의 물체가 가끔씩 이유 없는 공명현상을 일으키듯 의미 없는 말들이 모여 웅 웅 진동을 일으킬 때가 있는 법이다. 그 공명음과 날갯짓 소리는,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만 같은 공간을 차지한 듯 구분하기 어려운 하나의 음원을 가진 것 같기도 하였다.


혹여 다시 랭보처럼 머리를 깎아보면 어떨까. 그날의 아린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불쑥 모습을 드러낼까. 시집 표면에 박제된 흑백의 젊은 랭보에게 묻는다.

"그래서 어땠었니. 두통은 나아졌었니."



7.

머리 깎은 젊지 않은 한 사내를 바라 볼 세상의 눈이 한낮의 햇살처럼 날카롭다. 다행이다. 그 시선을 버텨보려는 용기가 나질 않아서. 더 큰 용기란 건 만용일 뿐이라고 위안하는 나의 허술함에 안도의 숨을 내 쉰다.

“다행이다. 조금은 더 비겁하고 조금은 더 겁쟁이처럼 살 수 있어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에 속살까지 진보라 빛으로 잘 익힌 포도송이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능선을 따라 내려온 바람에 퍼석하게 마른 흙먼지 한 덩이가 포도원 구석에서 몸을 일으킨다. 포도원에 딸린 낡은 주택 앞, 오래된 벤치에 앉아 나에게 그리고 랭보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두통을 나눈 오늘 아침의 감상을 글에 남겨 전한다.

나에게 보내는 편지

나에게 보내지만

내가 모르는 짧은 글,

매일 적어 채우지만

매번 어색한 내가 거기에 있더군

이 곤함이 삶 자체 때문만은 아닐 게야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에

두리번거림을 멈추지 못하는

어리석은 길 걷기 버릇 때문일 거야

길 걷기란 건, 어차피 끝이란 걸 알 수 없으니

그냥 터벅터벅 바쁠 것 없이 걸음 디뎌도 될 거야

스쳐 지나가면 그뿐이고

잡히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바람 같은 게

오늘 하루의 삶이야

바람은 매 순간이 절정이고

그 끝에서 문득 끊기기도 하니

미풍 살랑거리는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너의 절정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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