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사색하는 자, 장자크 루소와 길을 걷는다
15. 사색하는 자, 장 자크 루소와 길을 걷는다
어느 날 문득, 살아간다는 것이 더는 다가설 수 없는 기억의 어딘가를 허우적대는 것이 아닌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대도 애써 발을 디디려고 하는 것이 아닌지, 왜 그런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의아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먹먹한 빈 공간을 떠다니던 기억 하나가, 오래 전의 어릴 적, 마을 입구의 버스정류장 건너편에 박혀있던 허름한 사진관의 쇼윈도 안에서, 육십 촉 백열등의 불빛에 반짝이고 있었을 것 같은 사진 한 장에 가만히 인화되어 나타나고 한다.
손만 뻗는다면 금방이라도 만져질 듯 가깝게만 느껴지는 그것은, 먼지가 뿌옇게 낀 얇은 유리 한 겹만으로 날카로운 세상의 소음과 따가운 하늘의 햇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길을 걷는다. 어쩌면 이 길이 더 먼 길일 수 있다.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가 얘기한 것처럼, 더 먼 길이란 더 많은 생각을 위한 길어진 길일뿐 일수 있다. 루소의 말에 살을 조금 덧붙여 혼자 중얼거린다.
“나의 발이 걷고 있을 때 나의 머리는 생각하고 있다. 걸음을 멈추게 되면, 그곳이 어디이든 그때가 언제이건, 생각 또한 멈춰 서게 될 것이기에 나의 자유로운 사유는 오직 나의 자유로운 발걸음만을 따르게 된다.”
“어제는 그 길을 걸었었기에 오늘은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이고, 내일에는 저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 어제는 그 생각을 했었기에 오늘은 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고, 내일에는 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길을 가다 보면 낯설게만 느껴지는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다. 그런 길은 발바닥이 알아차리게 된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시간이 지난 탓인지 그 길이 지금은 명확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그 길은 나 스스로에 의해 선택되었던 길이었다는 것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타의에 의한 것’이라거나 ‘어떤 실수로 인한 것’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 마음을 편케 해주는 길이란 것을 알긴 하지만 사실 그 원인은 대개의 경우 자신에게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스스로를 위안해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말 그대로 단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기억하려 하지 않는 것’이거나 ‘어떤 사유로 인해 기억에서 지워버린 것’ 일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길을 걸으면서, 길 위에서 그것의 흔적을 더듬어내는 것만이 생각하는 자의 바람직한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길을 걷다가 보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나 지금 걷고 있는 길, 그리고 새로 걸어가야 할 길이 그리 달라질 것 없는 고만고만한 길일 거라고 여겨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다만 어느 하늘을 지붕으로 삼을 것인지, 지금껏 뿌리를 내렸다고 여겨왔던 땅바닥을 어떻게 옮길 것인지와 같이 주관적이고 주변적인 정황 몇 가지만이 그동안 달라진 것이고, 지금 달라지고 있고, 앞으로 달라질 뿐이라고, 그렇게 여기는 것이 현명한 처신이다.
누구나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그 길은 자신에게만 주어진 길이고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길이고 자신의 다리로 걸어가야 하는 자신만의 길이다. 그 길은 하나로 이어져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여기저기에서 끊어져있기도 하고 이리저리로 휘어져있기도 하고 여러 개의 길로 갈라지기도 한다.
인간의 사고는 그것이 희미하든 선명하든 어디에서 인가는 늘 경계를 만나게 되는 법이다. 그 경계에 다가갈수록 자꾸 걸음 머뭇거리게 되고 기억의 흐름은 고장 난 형광등처럼 깜빡깜빡 불규칙적으로 멈춰 서게 된다. 멈춰진 기억에는 여러 가지의 복잡한 작용이 가해진다.
기억의 어떤 부분은 단지 지난 흔적이 남긴 희미한 잔 먼지가 만들어 가는 것을 일종의 ‘산화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슴의 감성과 머리의 이성이 어떤 변형된 기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추측과 추론의 채색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멈춰 선 기억에 가해지게 되는 이 두 가지 작용은 하나에 대한 정작용과 다른 하나에 대한 부작용으로 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작용들은 인간을 생각하는 자로 살아가게끔 만드는, 어떤 존재에 의해 마련된 고도로 예민한 사고의 장치임이 분명하다.
여기에서 발걸음을 너무 오래 멈추게 된다면 늪에 빠져 버릴 것이다. 허우적거리며 더욱 깊이 빠져 들어가는 나를 방치하지 않으려면, 비록 느리게라도 걸음을 쉬지 않고 계속 디뎌야만 한다.
가다가 행여 쉬어갈 수 있게 된다면, 삶의 마지막 순간에, ‘아 더 이상 커피 잔을 들 수 없겠구나’라고 탄식했다는 루소와 함께, 커피 몇 잔을 연달아 기울이며 사색의 수다를 늘어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