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는 것의 용기
살아남은 자의 운명: 사색으로의 초대
버리는 것의 용기
1.
지금껏 등짝에 짊어지고 온 가방 안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담겨있다. 언젠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때그때 챙겨 넣었던 것들이 어느 날부터는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지금까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앞으로도 쓸모없는 것일 거라는 것을 알고는 있다. 몇 번이나 가방을 풀어내려 정리하려고 하긴 했었지만 그 순간마다 움츠려 드는 손으로는 아무것도 끄집어낼 수 없었다.
채워 넣는 것보다는 비우는 것이 더 힘든 것 같다. 무언가를 버리는 것에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가 보다. 버림에 대한 용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지금 자신이 매고 있는 가방을 더 채워 넣으려는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막상 채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도 사실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다. 이 말이 무책임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간에 어느 면에서는 옳은 부분이 있을 것이고, 다른 어느 면에서는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한 이야기가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 중에 하나인 것이다.
언젠가 자신의 눈앞에서 마주하게 될 후일의 상황에 있어서, 현재의 행위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맞는 것과 그른 것의 기준은, 판단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 오직 스스로의 주관에만 따르게 되는 것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채워 넣은 어떤 것이 후일의 언젠가에 꼭 필요한 무엇이 되기도 하고, 분명 이것이라는 확신에 호기롭게 밀어 넣은 어떤 것은 후일과 그 후일에도 그냥 가방 안의 한 공간만을 차지하고 있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후일에 자신이 처하게 될 상황에 따라 지금 가방에 집어넣고 있는 것이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2.
밤새 뒤척이든 잠에서 겨우 몸을 일으킨 어느 날의 새벽, 무거운 것을 잔뜩 짊어지고 아주 먼 길을 걸은 것만 같은 간밤의 피곤을 돌이켜 본다. 여느 날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 드는 것에는 어둠에게서나 날씨에게서 또는 지난 기억에게서라도 어떤 이유를 찾아볼 수 있는 법이다. 눈을 잠시 껌뻑이다 보니 무거움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세월을 그저 먹은 것은 아니구나.”
이만하면 다행인 게다. 지금까지 내었던 용기보다 조금 더 큰 용기를 내어 본다. 잠자리에까지 메고 있었던 가방을 풀어내려 조심스레 방바닥에 쏟아붓는다. 내 앞에 널브러진 것들을 가만히 살펴본다.
반짝임이 줄긴 하였지만 아직은 윤기가 남아 있는 것과 짙은 갈색으로 변해버린 것과 애초의 원형이 무엇이었는지 형체조차 알 수 없는 낯설기만 한 것과 둥그런 막으로 둘러싸여 그 안을 짐작하기 어려운 것과 너덜너덜해진 표지로나마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는 것이 마치 애초 나의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먹먹하게 흩어져있다.
“젠장 대체 저것들이 다 뭐람.”
자꾸 돌아서려는 눈을 끌어당겨 그것들을 빤히 쳐다본다.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하나의 그것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익숙한 구석이 찾아진다.
“그래 이건 이것이었고 저건 저것이었구나.”
손끝으로 쓰다듬어보기도 하고 집어 올려 만지작거려도 본다. 문득 반짝이는 작은 것에서 손이 멈춰진다. 손바닥 크기의 둥근 거울이다. 옷소매로 표면을 쓱쓱 몇 번 닦는다. 은빛 유리가 누군가의 낯선 모습을 비추고 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의 모습이란 걸 안다.
“새벽이라서 그런 거야. 아직 씻질 않았으니.”
저것들을 가방에 쑤셔 넣던 날에는 미처 몰랐었다. 아무리 씻어본들 씻지 않은 몰골이나 별반 차이 없는 날이 언젠가 올 것이라는 것을.
시간은 큰 비에 불어난 개울물 같이 흐른다. 그런 날이면 어릴 적 마을 어귀에 있던 개울에서는 작은 피라미라도 몇 마리 더 잡을 수 있었지만 시간은 그냥 아무것도 없이 흐를 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속절없다고도 한 것 같다.
언제 이렇게 흘러간 것인지 어느 누구도 말을 해주지 않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은 직접 원망하라고, 그렇게라도 해서 위안을 받으라고, 그래야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일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원망을 들어야만 하는 시간이 안쓰럽기는 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시간에게도 탓은 있다.
“그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리고 지금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시간의 죄인 것이야.”
창 밖 멀리에서 하루의 빛이 기울고 있다. 어느새 짧은 시곗바늘이 한 바퀴를 둥글게 돌아 다시 오늘 새벽의 그 자리를 넘어서고 있다. 이제 버려야 할 것을 골라내어야 할 때이다. 그래야만 새 밤의 잠자리가 가벼워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손끝이 떨린다.
“무엇을 버려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