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발리스를 찾아서, 돌아보기

노발리스를 찾아서, 돌아보기


1.

"문학이야말로 거짓이 없이 절대적으로 진정한 것이다. 이것이 나의 철학이다. 시적이 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욱 진실해지는 것이 문학이다."


그 시절의 나를 사로잡았던 이 멋있는 말은 문학에 대한 <노발리스>의 철학을 옮긴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노발리스>의 작품에 대한 문학적인 평가나 그가 남긴 족적에 대한 기술과 분석이 아니다. 왜 <노발리스>를 찾아가려 했었는지, 그때는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인지, 그 시절에 저질렀던 흉내내기를 돌아보며, 그것에 대한 어설픈 변명을 지극히 개인적인 입장에서 늘어놓으려는 것이다.


이야기란 게 원래 입 밖으로 튀어나오면 주절주절 길어지기 마련이고 그러다가 보면 종종 이성의 영역조차 넘어 설 때도 있게 된다. 그러니 적당한 지점에 멈추어 서서 대충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리는 것이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그것을 ‘언젠가’라는 단어를 불쏘시개 삼아 휘젓다가 보면 간혹은 제 혼자 다듬어지고 살이 붙여서, 모호하긴 하지만 적당한 형태를 갖추는 경우도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글 읽기 습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문학과 철학을 대충 둘러친 울타리 안에 한꺼번에 밀어 넣고선 시간이 날 때마다 뒤적거리며 들추어보는 습성이 있다. 그 결과란 게 가끔은 이상하고 모호한 논리를 발현시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기에 나름대로는 아는 채하며 지금껏 잘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문학과 철학 사이에는 살갗을 비비며 살아가는 부부 사이에나 있을 법한 애증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그 관계란 건 가장 가깝기는 하지만 너무 먼 것 같고, 서로를 아는 것 같은데도 제대로 알지는 못하는 것 같고, 붙어 지내려 하지는 않으면서도 멀리 떨어지려고도 하지 않는,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느낌과도 같은,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을 하곤 있지만 사실은 철학과 문학 중에 어느 것이 어느 것의 바탕인지, 누가 누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하긴 살아가다 보면 ‘명확하지 못하다’는 것이 편리해지는 경우가 생각보다 늘 많다. 분명 어떤 구분이 있을 것 같은데도 막상은 그것의 경계가 너무 희미해서, 떼어낸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만 같은, 그런 시도를 했다는 것이 결국에는 무색해질 것 같은, 그래서 그냥 넌지시 바라보며 불만 없는 눈웃음으로 흘겨보아야 하는 모호한 생각이나 상황에 빠져드는 일이 의외로 잦게 된다.



2.

거꾸로 흐르는 벤자민 버튼의 시계처럼, 그것이 고장 났기 때문이건 어떤 주어진 역할에 의해서이건, 시간의 바늘은 그때로 돌아간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살아가던 도시의 어느 구석진 공간에 도착한다. 어지럽게 흩어진 낡고 누런 책들이 뿜어내는 퀴퀴한 호흡과 좁은 창을 너머 방 안 깊이 들어선 불빛에 부유하던 메케한 담배 연기와, 참 크래커 부스러기가 버석거리는 장판 위에 눌어붙은 흑갈색 맥스웰 커피가루의 찐득거림 속에서, 나라고 얘기되는 이름에 대해 깊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든 적이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에 대한 고민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꼭 헤쳐나가야만 하는 파도 거친 냉랭한 바다이자 뜨거움에 메마른 사막과도 같았다.

성姓이라고 하는 것이 '혈족(血族)을 나타내기 위하여 붙인 칭호'라고 정의되어 있기에 가족이란 공동체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임에는 다른 어떤 논쟁의 여지를 찾아낼 수 없었다. 따라서 성은 한 가족의 동질성을 나타내는 ‘Family Name’이고,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된 것에는 분명하다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았기에, 그것에 대한 더 이상의 고민 따위는 접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람의 성을 ‘Last Name'이라는 부르는 것에서는 그것이 '최종적인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튼 '최종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의무는 가져야 하지만 결코 권한은 주어지지 않는' 이기적인 궁극의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Given Name’ 또는 ‘First Name’이라 불리는, 누군가 자신에게 붙여 준 이름에는, 자의에 따라서는 또 다른 의미나 변형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당시 책상머리에 꽂혀 있던 알베르 카뮈의 후기 작품들인 ‘페스트’와 ‘정의의 사람들’, ‘반항인’의 주제인 ‘반항’의 어설픈 흉내 내기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음을, 젊은 반항기가 부린 사술 같은 해괴한 짓이었을 수 있음을, 부끄럽지만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세월은 사람에게 괜한 솔직함을 주거나 쓸모없는 무모함을 주는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것 같다. 그 시절엔 입 밖으로 뱉어내지 못했을 고백을 이젠 마치 자기가 아닌 누군가에 의해 저질러진 일인 양, 아무런 느낌 없는 듯 떨림 없는 평온한 목소리에 뱉어낼 수 있게 된 것은, 언젠가부터 세월의 권능에 굴복해 버린 스스로의 현명함 덕분일 수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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