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고 여차저차의 일들을 거치면서, 나의 이름에 붙어 있는 두 글자의 한문을 분석해서 얻은 것이라곤, 누군가 조상님의 제삿날에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그래서 어릴 적엔 먼 친척 벌 정도로나 여겼었던, 커서는 남이나 다를 바 하나 없었다기보다는 남보다도 더 못한 것 같다고 여겼던, 정머리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전혀 없었던 할아버지라는 인물에 의해 그것이 붙여졌다는 것과, 물론 그것 또한 그리 신빙성이 있어 보이진 않지만, 두 개의 글자 중에서 끝자리 하나는 그나마도 대대로 그냥 사용해야 하는 돌림자라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갓이라 불리는 검고 둥근 모자를 머리에 쓰고 다니셨던 그 영감님이 나에게 저지른 행위는 참으로 간단하였다. 나의 이름에 붙일 수 있었던 것이라곤 가운데 글자 하나뿐이었고 그것마저도 획수가 가장 작은 한자로 채워 넣음으로써 그 영감님은 할아버지라는 명칭에 의해 부여된 나름의 도리를 다 하셨다고 여겼던 것 같아 보였다.
딜레마에 빠지기 딱 좋은 상황이었다. 악법도 법이라던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미 주어진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것도 스스로 그것을 뜯어내고 개명한다는 것은 도의적으로,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큰 부담을 안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면 뭐, 다른 이름 하나쯤 더 가지면 되지.”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최선이라 여기는 버릇은, 세상살이를 아주 편하게 만들어준다. 어쨌거나 그 시절엔 ‘스스로에 의한 스스로의 이름’을 가져야만, 삶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아울러 나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주어진 이름을 그저 사회통념상의 이름으로 보고, 나라는 실체가 지은 또 다른 이름을 갖기로 결정하였다.
작명이란 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의미를 담은 몇몇 한자어들이 머릿속과 종이 위를 머물다가 지나갔고 잘 알려진 지성들의 이름들 또한 후보군에 올랐었다. 어쨌거나 여러 고민의 과정 끝에 건져 올린 것은, 지난 몇 개월간 나를 괴롭히고 질책했던 3명의 이름인 프란츠와 노발리스, 그리고 헤르만이었다.
그 순간 이 세 개의 이름은 스스로가 생명의 호흡을 가진 살아있는 개체가 되어, 마치 아무런 관계가 없는 듯이 보이기도 하였지만, 심연의 뿌리 끝에서 서로 단단하게 연결되어,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아 보였다.
그것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거듭된 인내의 시간이 필요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안전한 도피처의 입구엔 틀림없이 ‘타협’이란 문패가 걸려 있을 것이고 흔히 타협의 결과를 결론이라고 부른다. 나의 결론은 먼저, 프란츠로 살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노발리스, 종내에는 헤르만으로 살아가자는 것이었다. 실존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그 너머를 찾아가는 삶의 길을 일련의 이름들이 이끌어줄 것 같았다.
그때란 것이 언젠가 분명 다가올 것이라고 확신하였지만 시간이란 것이 앞으로 나아갈지 뒤로 돌아갈지는 알 수 없으니, 정확성을 가진 표현으로는 옮길 수 없었다. 막연한 기다림, 그것은 스물의 물기 찬 푸름이 경계하는 마른 갈색의 바람이었지만, 부족한 지혜의 공간을 넓혀갈 시간적 연장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누구도 그때를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본능은 그것을 알 수 있다. 노발리스를 찾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절대의 허위가 없이 절실함에 나선 이 낯선 길이 노발리스를 찾아가는 길일 것이다. 얼마나 가야 할지, 어디까지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과 공간의 문을 열어, 파란 꽃이 피고 지는 새 땅을 찾아갈 때이다.
아래의 시는 초기 낭만주의 작가인 노발리스의 푸른 꽃(파란 꽃)에 실린 <헌시>라는 제목의 시로서 노발리스가 사랑했던 약혼녀 소피에게 바친 것이다. 원문 중에 행마다 연이어 나타나는 지시대명사와 고유명사 등은 감상의 흐름을 위해 생략 또는 약간의 의역이 있었음을 밝힌다. 사실 운문인 시를 번역하는 것은 번역하는 이의 문체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낭만주의자 노발리스가 사랑하는 약혼녀인 소피에게 받친 시라는 것을 읽는 이의 감상 중심에 놓는다면, 자신의 사랑 경험이 반영된 낭만적인 사연 한 편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노발리스
그대는 내 가슴에 고귀한 충동을 일으켜
깊고 넓은 세상을 보여주었고
그대가 내민 믿음의 손을 잡은 나는
거대한 폭풍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되었지
그대의 예지능력은 한 소년을 돌보았고
환상의 초원으로 데려갔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그대는
그 소년의 가슴을 뛰게 하였지
이 가슴과 삶은 영원히 그대의 것이고
당신의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나의 은신처인데
나는 어찌하여 이 지상의 고통에 매달리고 있는 것인지
이제 그대를 위하여 이 노래를 부르리라
그대 나의 아름다운 사랑이여
부디 나의 뮤즈가 되어
내 노래의 조용한 수호자가 되어주오
지상에서 우리는 노래의 힘을 느끼고
그것은 끝나지 않을 평화가 되어
저기 먼 나라를 축복하고
젊음의 힘이 되어 우릴 감싸리라
노래의 힘은 우리의 눈을 찬란한 빛으로 가득 채워
예술의 아름다움을 내려주었고
언제나 마음을 경건하게 해 주었지
벅찬 노래의 감정은 나에게 힘을 주어
노래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도록 하였고
또한 화사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해주었지
나의 예민한 감각이 달콤한 잠에 잠겼을 때
노래의 천사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지
잠에서 깨어난 나는
그 천사의 품에 안겨 날아오르고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