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산자락 끝에 걸려 있던 오늘의 해가 검붉은 숨을 가쁘게 몰아 쉰다. 어쩌지, 마음은 급하기만 한데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팔을 잡아당기고 있으니. 하긴 미적거리다 겨우 나선 길에선 등을 떠밀어 걸음을 재촉하는 등 바람이나 가슴을 막아 걸음을 멈추게 하는 맞바람이나, 뭣 하나 다를 바라곤 없이 그저 무정하기만 한 것을.
그늘 깊은 계곡에 들어서자 하늘을 빼곡하게 뒤덮은 이른 새벽녘의 박쥐 떼 같은 바람이 방향 없이 거칠게 불어온다. 무엇을 찾아 검은 호수에 조각배를 띄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벌써 지워버린 것일까, 혼란스럽다. 노를 저을수록 짙어지는 물빛은 하늘에 걸려있는 달빛을 흡수해버리고 있다. 이곳에는 오직 태초의 케이아스만이 수면에서 찰랑거리고 있을 뿐이다.
현실의 걸음은 어떠했는가. 회청색으로 짙어진 어둠이 하늘을 온통 채우도록 어디 한 곳, 마음 내려 쉬어갈 곳을 찾지 못하였으니, 원망을 핑계 삼은 방랑기가 가로등 불빛을 햇살 삼아 밤길을 배회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살아온 날만큼 표정을 잃는 얼굴에서는 어지럼증이 배인 눈만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행여 누군가 나를 본다면, 남루해 보인다고 할까 봐서 두 손으로 옷매무새를 바루고 신발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본다.
언젠가의 늦은 산책길이 이러했지 않았을까. 바지 주머니 깊숙이 양 손을 푹 찔러 넣고 감상의 취기가 가득 오른 마음으로 바람이며 하늘에게 주정을 부려대며 갈 지자의 걸음을 비틀거리며 걸어 다녔지 않았을까.
바람은 그저 불어서 오고 불어서 갈 뿐이다. 왜 부는 것인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아무것도 말하려 들지 않는다. 바람은 원래부터 무심한 존재이다. 그래서 바람인 게다. 그 바람을 원망한들, 그 무심함을 탓한다 한들, 지나간 시절의 발자국 소리와 웃음소리는 다시 들지 못한다.
몇 걸음 걸어오지 않은 것 같은데도 머리 희끗한 바람이 불어온다. 파뿌리로 변해버린 지난 바람에게는 초록이 물이 올라오지 않는다. 새롭게 불어올 바람에게 손끝이라도 적셔 볼 요량이라면, 더 이상 지나간 바람에 마음 두지 말아야 한다.
내 것이었지만 이젠 내 것이 아닌 지나간 바람의 줄기를, 흑백영화의 필름 속으로 밀어 가둔다. 언젠가 머리 위를 지나는 퀴퀴한 불빛 한 줄기가 그 색 바랜 필름의 컷을 눈앞에 조사할 때도, 지나가고 있는 오늘의 이 바람을 탓하는 애꿎은 일일랑은 없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