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많은 시간 동안을 인파이터로서 살아왔었고, 실제 생활에서는 어쨌었던지 간에, 그렇게 살아가길 바랐었던 것 같다. 아주 오래전, 기억에조차 남기지 않으려 애를 썼던 어느 날인가부터, 인파이터로서의 삶은 분명 나의 운명이었고 삶이라는 거친 항해 길을 이끌어주는 등댓불이었다.
사실 삶은 원래부터 형체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막연한 것이어서, 하고 싶은 것과 되고 싶은 것을 이것저것 뒤죽박죽 대충 섞어 놓고서는, ‘운명’이라는 안개 자욱하게 낀 용어 안으로 밀어 넣으면 될 뿐이다.
시간이 지난 언젠가부터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왜 그랬을까. 혹시 인파이터적인 삶이 멋있어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또 다른 삶이었던 아웃파이터적인 삶을 생각해보면, 꼭 그렇다고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대체 왜 그렇게 살았던 것일까. 이제라도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그 시절의 삶을 곰곰하게 돌이켜봐야겠다. 그러다가 보면 그 어딘가에서 ‘왜 그랬었는지’라는 물음에 대한 작으나마 실마리라는 것을 얻게 될지 모르겠다.
생활이라는 현실을 바탕으로 보게 되면,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의 어느 구석에서도 '철'이란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 시절의 사내놈에게 그것의 미스틱한 느낌이 잘 맞아떨어졌을 수 있었을 것이고, 또한 어쩌다 보니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고, 그럴 수밖에 없는 삶의 형편에 지배를 당했기 때문이라는 추측에 신빙성을 주어도 좋을 것 같다.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조차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하물며 어찌 이미 긴 시간이 지나버린 것을 제대로 알아낸단 말인가. 하지만 답이란 것이 찾아지지 않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괜스레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이, 나와 우리라는 인간인 것이다.
어쨌든 인파이터적인 삶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을 나의 삶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이자 철학이었고,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의 규범이었다. 규범이란 거창한 말로 표현하고 보니 그 규범이란 것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
‘이러이러해야 한다’든지 ‘이러이러한 것은 안 된다’는 몇 가지 규칙을 머릿속에 두루뭉술하게 정해 두었었다. 24시간이라는 하루의 단위가 늘 부족하기만 했던, 그래서 어떻게든 수면의 시간을 줄여야만 했던 그 시절의 삶은, 해야 할 것과 미루어 둘 것, 그리고 그것의 과정과 진행에 따른 고찰과 같이,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들을 낱낱이 기록하게 만들었었고, 어떤 것에 대한 기록은 몇 번을 지우면서 수정하다 보면 대전제와 행동강령의 형태로 나타나곤 했다.
인파이터적인 삶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몇 가지의 큰 줄기를 생성해 내었었다.
1. 나의 몸을 항상 무대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2. 체력과 맷집은 기본이다. 그래야만 지칠 줄 모르고 목표를 향해 파고들 수 있다.
3. 빈틈을 보이면 절대 안 된다. 끝없이 몸을 움직이며 양팔과 발을 앞을 향해 뻗어야만 한다.
4. 나를 향해 무수히 쏟아지는 주먹질과 발길질, 총알과 포탄은 내가 지금 아주 잘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전장의 위험에 노출된 나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곳이 무대의 중앙이란 뜻이고 내가 그 무대의 주인공이란 것이니 절대로 피해야 할 일이 아니라 쌍수를 크게 펴서 반겨야 할 일이었다. 조연이나 찬조로 무대에 오른 이에게는 상대 출연진의 맹렬한 공격이 쏟아지지 않는다. 그 싸움판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그 위험을 견디는 것은 주인공으로서의 즐거운 의무이고 그 순간은 즐길만한 시간인 것이었다.
또한 스스로를 향한 적당한 최면은 인파이터에겐 필수였다. 숨이 멈출 듯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무대의 중앙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전장을 누비는 거친 발걸음이, 들꽃이 만개한 산들바람 부는 들판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를 쫓아 뛰어다니는 아이의 걸음과 다를 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거렸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에게 인파이터로 살아간다는 것은, '나'라는 개체가 인정할 수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과도 타협할 필요가 없고, 나의 주관이 곧 세상의 객관이라고 여기며, 내가 선택한 길을 거만한 걸음으로 걸어가도 좋다는, 맹목적인 이성의 실천 행위였다.
그렇게 인파이터적인 삶이란, 곤궁을 견뎌내야만 했던 그 시절의 사내에게, 자신의 삶과 행실을 합리화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중독성 강한 환각제였다. 그리고 인파이터로서 살아가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한 시도는 그 성공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때때로 그리고 수시로, 언제 어느 곳에서나 가려야 할 필요 없이 행해졌었다.
어차피 살아간다는 것이 그 종점을 알 수 없는 길을 무작정 걸어가는 것이란 걸 알아차리긴 했지만, 어딘가에는, 비록 그곳이 아주 먼 곳이라 해도, ‘갈 곳’ 정도는 있을 거라고 여겼다. 그곳이 ‘갈만한 곳’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그곳을 향해 걸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어쨌든 그 시간의 걸음은, 늘 ‘지금 걷고 있는 길이 그곳으로 가는 길’이라고 여기면서 누군가의 흔적을 고불고불하게나마 따라가면 될 뿐이었다.
지칠 때는 없었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왜 없었겠어, 당연히 있었지.”
하지만 자기 최면이 주는 환각의 작용은, 하루 종일 피로에 찌든 몸을 이불에 던져 넣지만, 뒤척이기만 할 뿐 잠에 빠지지 못하는 날의 야식처럼, 거부하기 어려운 법이다. 치열한 경기를 마친 다음 날, 축 늘어진 몸을 뒤척여 겨우 깨어난 어느 날의 아침, 그것이라고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뿌옇게 채워져 있었던 밀폐된 좁은 공간은, 몇 번 호흡을 들이켜면 다행히도 다시 몸을 경기장에 올릴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런 날이 반복되다 보면, 당연히 그런 것이고 그래야만 한다고 여기기 마련이었다.
몸에 새겨져 있는 연식이 이제 그 길을 그 걸음으로 다시 걷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지만, 머리에 쌓인 연식은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현명함을 더해 준 것 같다. 현명함이라 부르는 그것을 체념이라 여기던, 관조라고 여기든 애써 신경을 둘 필요는 없다.
인파이터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숨어들 곳 없는 황량한 거친 광야에 자신의 몸뚱이를 굴리는 것과 같고, 사위를 구분하기 어려운 우거진 정글에 혼자 기어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는 데에는, 시간의 연마 작용이 필요했었다.
후회 따윈 없다. 아니, 후회는 하지만 후회를 인정할 수는 없다. 인생은 후회를 인정하면 살아가기엔 너무 짧기만 하다. 아직도 나의 몸은 인파이터로 살아왔던 시간들을 기억하고 있다. 뼈마디며 몸의 구석구석에서 삐거덕거리는 불유쾌한 흔적은 근사하게 치러 낸 지난 경기들의 훈장들이다. 아직 몇 군데, 훈장을 달만한 곳을 찾아본다.
“그까짓 것들, 뭐 별거 아니었다. 나에겐 아직 빈 공간이 남아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