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Bob Dylan, 1941- )은 그의 노래 <Knocking on Heaven's Door>을 부르면서 천국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작가 니코스 카잔차스키(Nikos Kazantzakis, 1883-1957)는 말했다.
“천국의 입구에서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어떡할 거냐, 그럴 땐 천국 문을 향해 총을 쏘아라. 그러면 하나님이 네가 온 줄 알고 문을 열어 줄 거다”
사람들은 그런 카잔차스키를 ‘가장 그리스인다운 사나이’라고 부른다.
밥 딜런과 카잔차스키 같이 사람은 누구나 천국의 문이 열리기를 꿈꾼다. 하지만 문이 닫힌 천국에 대한 무지는 그 환상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닫혀 있는 문은 어떻게든 열지 않는 한 그 안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삶에서도 사랑에서도, 삶과 사랑은 또 다른 형태의 천국이기에 닫혀 있는 문을 열기 위해 노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너의 닫힌 가슴을 열고 싶고, 추억의 빗장을 열고 싶고, 닫혀 있는 그 무수한 문들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하지만 그 문들은 안타깝게도 오직 나에게만 닫혀 있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탑에 갇힌 공주를 구하러 세상을 향해 떠난 돈키호테는 어떻게 높은 탑의 꼭대기에 있는 공주가 갇힌 방의 문을 열 수 있을까. 돈키호테의 집착은 공주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닫힌 문을 열어야만 할 것 같은 인간의 본능일까. 닫혀 있는 문을 열면 천국이 있을 거라는 믿음은, 세상의 모든 문이 오직 나에게만 열리지 않고 천국의 문은 나에게 열릴 것이라는 진리를 향한 것일까, 인간의 부족함이 만들어낸 막연한 동경 때문인 것일까.
돈키호테를 오래전부터 글과 노래에 담고 싶었다. 말을 타고 광야를 달리는 앙상하고 허술한 그보다 어느 하나 나을 것이라곤 없는 스물의 몸뚱이는 <이청>이란 가수의 <돈키호테>란 노래를 부리기 좋아했다. 캠퍼스를 돌아다니면서 알코올에 적신 생목이나, 잔디밭에 퍼질러 앉아 싸구려 합판 기타를 '지직지직' 퉁기면서 금세라도 공주를 구하러 달려 나갈 듯 호기롭게 소리를 질러댔다.
빚을 진 듯 쫓겨야만 했던 나의 빈곤한 상상력은, 제목과 구성만 정한채로 빈 얘기의 몸뚱이를 오랫동안 던져두었다. 그것은 ‘시간의 숙성 작용을 믿었기 때문’이라는 자기 위안이 적당한 때마다 도와준 덕분이었다. 나에게 돈키호테는 돈키호테이자 로시난테이고 산초이다. 그 셋은 주제이고 부제는 탑에 갇혀서 기사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공주님이다.
어느 날, <로시난테의 고백>이 뼈대를 잡아 글자 속에 박혔고 다시 시간은 언제나처럼 느긋느긋 흘러갔다. 돈키호테에 대한 글을 쓴다면서 왜 <로시난테>가 먼저 떠오른 것인지는, 나 자신도 궁금하다.
“왜 돈키호테가 아니라 로시난테지”
늦은 밤과 새벽이 열린 창을 너머 헤일 수 없을 만큼 자욱하게 서재에 찾아와서 나와 나의 글을 검게 가두었다가 물러나길 반복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벽을 향해 한쪽 모서리를 붙이고 놓여 있는 낮은 등불 아래에서 <돈키호테의 독백>과 <산초의 증언>이 골격을 갖추었고 어린 젖살이 방향 없이 오른 것을, 햇볕이 허공에서 서성이는 날, 넘치는 것 깎고 부족한 것 붙여가며 적당히 손을 봤다. 이윽고 <로시난테의 고백>이 그 뒤를 따랐다.
이젠 펜을 내려놓을 때라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문 앞에서 서성인다.
“저 문이 공주님이 갇혀 있는 탑의 문인 걸까.”
“저 문을 지나가게 되면 난 어떤 모습이 되는 걸까. 돈키호테일까 로시난테일까, 아니면 산초일까.”
“로시난테를 달려 저 문을 향해 돌격하게 되면 '끼익' 열리는 경첩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