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산초 판사(Sancho Panza)야
난 돈키호테를 보살펴야만 해
그는 내가 모시는 기사이거든
나는 알고 있어
사실 그는 나이가 많은 데다가
깊은 마음의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내가 필요해
자신이 필요한 곳에 있게 될 때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 사람이야
그를 보살피는 일이 나의 삶이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나도 알 건 다 알고 있어
돈키호테는 기사가 아니야
그는 단지 꿈을 꾸는 사람일 뿐이야
사람은 누구나 그렇지만
그는 꿈을 꾸고 꿈에서 본 것을
사실이라 받아들이고 있어
그렇다고 그를 너무 이상하게는 보지 마
그를 이상하게 보는 너도
이상하긴 마찬가지 거든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일랑은
아주 이상한 것일 거라는
‘이상한 범주’로 치부해 버리려는
못되고 나쁜 버릇이 있어
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유일한 사람이야
그건 나만이 돈키호테가
진정한 기사란 걸 알고 있다는 말이기도 해
아, 돈키호테의 마지막 순간이 떠올라
어떤 기억은,
그래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불현듯 소환되어 나타나기도 하거든
깊은 병에 걸린 그는 어느 날
마지막인 것 같은 숨을 내쉬었지
그때서야 그는
자신이 기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나에게 실토했어
난 그가 세상을 떠나려는 순간에도
얼른 일어나서 갑옷을 입고 로시난테의 등에 올라
공주님을 구하러 함께 떠나야 한다고 재촉했어
그의 실토와는 상관없이
돈키호테는 진정한 기사 거든
그래서 탑에 갇힌 공주님을 구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신성한 의무인 게야
거친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돈키호테는 곧 ‘나’야
그리고 그는 ‘나의 희망’이기도 해
그는 넘치는 자질을 가진
나의 주인이자 나만의 기사야
그가 멋있는 기사이기에
내가 훌륭한 시종일 수 있는 거야
나를 돈키호테에게 붙어 다니는
한낱 시골뜨기 종자(從者)에 불과하다고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것 만으로
세상의 일을 판단하려고 하지 마
겉은 투박하고 나이 든 촌부처럼 보여도
누구보다 현명하게 세상을 볼 수 있고
아직도 뜨거운 로맨스를 꿈꾸는
나는, 가슴이 멋진 사나이야
잘 생각해 봐, 예쁜 공주님이
어디 저 혼자서만 기사님을 기다리고 있겠어
그 탑에는 하녀 또한 함께 갇혀 있을 거고
공주를 보살피는 그녀의 마음이며 얼굴도
무척이나 사랑스러울 것이 분명하지 않겠어
공주님을 구해서는 어쩔 거냐고
당연한 거 아냐 왜 물어
넌 어릴 때 동화책을 잘 안 봤구나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동화책을 읽어 봐야 해
동화책 읽기엔 나이가 상관없어
동화는 부족한 상상력의 머리 위에
달콤한 빗물을 보슬보슬 내려 줄 거야
원래 공주님과 기사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거야
“공주님과 기사는 얼러리 꼴러리 하면서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
원래 동화책은 이렇게 마무리를 해야 하는 거야
스토리의 전개를 조금 바꿔보면 어떨까
돈키호테와 공주님은 '심한' 나이 차이에다가
넘을 수 없는 ‘신분’의 차이로 인해
주변의 극심한 반대와 격렬한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고
그런 것들을 어찌어찌 극복하긴 하였지만
결국에는 서로의 ‘성격 차이’를 깨닫게 되면서
지지고 볶으면서 남들처럼 살아가게 되었더래요
이것 봐, 그냥 동화보다 이게 더 극적이지 않니
약간의 막장은 얘길 더 흥미롭게 만들어 주지
이래도 내가 조금 모자라 보이니
그런데, 돈키호테와 공주님의 이야기가 동화냐고
상관없어,
알만한 건 다 아는 게 요즘 아이들이 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