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1599–1600,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
카라바조의 <성 마태의 순교>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실질적인 의뢰인인 마태오 콘타렐리(Matteo Contarelli) 추기경(1519–1585)이 제시한 ‘작품의 내용에 대한 지침’과 성 마태가 죽임을 당하게 된 경위를 알아두는 것이 좋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작품이 완성(1600년)되기 15년 전(1585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콘타렐리 추기경은, 자신의 수호성인인 성 마태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자신의 영원한 안식처인 콘타렐리 채플을 장식하라는 유언과 함께 이에 필요한 경비 일체와 작품의 내용에 대한 지침을 남겼다.
기록에 의하면 1599년 7월경에 작품의 의뢰서가 공식적으로 접수되었고, 작품을 제작을 위해 콘타렐리 추기경이 남겼다는 지침이 카라바조에게 전달되었다.
성 마태는 옷을 입고 있고 미사를 집전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병사들의 손에 죽음을 당한다.
작품 속 마태는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거나 쓰러지는 중이다. 또한 마태는 죽임을 당하고 있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
그때 순교의 현장에는 남녀노소 여러 명의 사람들과 천사가 있다. 그들은 대부분 마태의 순교 장면에 경악하고 있으며, 일부는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거나 연민을 품고 있다.
이 지침만으로도 <성 마태의 순교>의 내용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성 마태의 죽음>은 성 마태의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의 전도 활동과 관련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에티오피아에서 복음을 전하던 성 마태가 중병을 앓고 있던 에우지포 왕의 왕자를 기적적으로 치유하였다. 이 일로 인해 성 마태는 에티오피아의 왕가에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는데, 이때 왕가의 한 사람인 이피제니아(Iphigenia) 공주는 하느님을 위해 자신의 동정을 지키기로 하느님께 서약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이를 ‘동정 서원’이라 한다.
그런데 에우지포왕 다음으로 힐타코가 에티오피아의 왕이 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이피제니아의 미모에 반한 힐타코는 이피제니아를 왕비로 삼으려고 했지만 이피제니아는 그년가 동정 서원을 서약했다는 이유로 힐타코왕의 청혼을 거절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힐타코왕은 그녀의 거절이 성 마태의 계략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자객을 보내서 성 마태를 죽인다.
세속의 눈으로 보자면 성 마태의 죽음은, 아름다운 여인에게 눈이 먼 한 왕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한 것이고 이야기의 전개 또한 극적으로 펼쳐지기에, 다소 황망하게 느껴질 수 있다. 게다가 성 마태의 순교라고 하면, 종교적인 탄압에 기인한 것이어야 할 것 같은데도 막상은 그렇지 않으니, 비록 ‘동정 서원’이라는 종교적인 서약이 이야기 중에 끼어들어 있긴 하지만, 그리 성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 마태가 자신의 수호성인이었던 마태오 콘타렐리 추기경은 이 이야기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던 것 같다. 콘타렐리 추기경에게는 성 마태가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이, 그가 죽은 후에도 되새겨 보고픈 성스럽고 감명 깊은 장면 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그렇기에 추기경은 바로 이 장면으로 그가 영원히 잠들게 될 콘타렐리 채플을 장식하도록 막대한 자금과 지침을 남겼고, 그가 죽은 후 14년이 지난 1599년에, 다음 해인 1600년에 있을 가톨릭의 희년을 맞이하여, 카라바조가 <성 마태의 순교>를 콘타렐리 추기경의 지침을 따르면서도 카라바조다운 해석과 화풍으로 그린 것이 1600년부터 지금까지 콘타렐리 채플의 제단 위에 걸려 있는 것이다.
<성 마태의 순교>의 작품을 의뢰받기 전까지는 작은 크기의 캔버스에 주로 그림을 그렸던 카라바조에게 무려 323cm × 343cm에 이르는 대형 제단화를 그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의 작품 <성 마태오의 순교>에서는 카라바조가 부딪혔을 어려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엑스레이를 이용하여 작품을 촬영한 결과를 보면 카라바조는 <성 마태의 순교>를 그리면서 최소 두 번에 걸쳐 구도를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성 마태의 소명>에서 다룬 것처럼, 구도를 변경하는 것은 개인적인 감흥이나 종교적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카라바조가 그때까지 대형 제단화를 그려본 적이 없었기에, 작품 속 이야기의 핵심 인물인 성 마태와 자객, 그리고 등장인물들을 이야기에 부합되도록 배치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구도적 변경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학자에 따라서는 카라바조가 1599년 같은 해에 먼저 작업을 시작했던 <성 마태의 순교>보다 뒤에 작업을 시작했던 <성 마태의 소명>이 앞서 완성된 것이, <성 마태의 순교>의 구도가 처음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다. 어쨌든 같은 해에 완성된 두 개의 작품 중에서 첫 번째로 그리기 시작한 <성 마태의 순교>보다 두 번째로 그리기 시작한 <성 마태의 소명>이 먼저 완성된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작품의 구도를 수정하는 일은 화가에겐 드물지 않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건물을 짓는 건축가의 경우에도 처음의 설계와는 달리 시공과정에서 여러 가지의 변경을 가하는 일은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일이다.
물론 그림을 그리는 것과 건물을 짓는 것은 크게 다른 일임에는 분명하다. 건물을 건축하는 과정에서는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된 후에는 전체적인 구도의 변경이 어렵지만, 그림을 그리는 것에서는 그렇지 않다. 기존에 그려진 그림 위에다가 다른 구도의 그림을 다시 그려 넣으면 되기 때문에, 물론 그것이 말처럼 단순하고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림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전체적인 구도의 변경이 가능하게 된다.
특히 <성 마태의 순교>와 같이 등장인물이 여러 명인 경우에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각적인 전달력과 표현력을 높이기 위해 이 부분 저 부분에서 수정과 보완이 필요해 보이게 되고, 그렇게 여러 번의 수정을 하다가 보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싶은 욕심에 전체적인 구도를 바꾸고 싶어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예술작품을 사랑하는 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카라바조가 작품의 제작 도중에 구도를 바꿨다는 이유와 먼저 그리기 시작했던 작품을 작업 중에 중단하고 뒤에 그리기 시작한 작품을 먼저 완성했다는 이유로 인해, 카라바조가 <성 마태의 순교>의 구도를 처음부터 잘못 잡았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성 마태의 소명>에서 주지한 바와 같이 카라바조가 그림을 의뢰받아 그림을 그렸던 1599년에서 1600년까지의 그의 삶의 배경과 그가 처했을 신앙적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하나의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만을 들여다볼 것이 아니라 작품을 제작하던 시기의 작가와 관련된 직간접적인 환경과 사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따라야 할 것이다.
또한 풍경이나 정물을 그리는 것과 여러 등장인물들이 하나의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작품을 그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문제에 있어 카라바조의 천재성까지 고려한다면 <성 마태의 순교>에 있었던 구도의 변경에 대한 부정적인 주장에는 큰 무리가 있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가로 세로가 각각 3미터가 넘는 ‘한 편의 스토리가 있는 다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형 그림’을 작업하다가 보면 작품의 최종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림의 구도를 바꾸고 싶은 욕구에 빠지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욕구를 실제로 행위로 옮기기에는 대단한 결단력이 필요하다. 화가는 이 변경으로 인해 작품의 제작 기간이 길어질 것과, 그로 인해 발생할 후폭풍이 두려워 막상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하게 된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달랐다. 그는 적어도 2번에 걸쳐 작품의 구도를 바꾼 것이고 그로 인해 카라바조의 화풍이 담긴 다운 <성 마태의 순교>를 지금 우리가 감탄하며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카라바조는 대단한 결단력과 리더십을 가진 화가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카라바조는 구도의 수정을 위해서 <성 마태의 순교>를 주제로 한 다른 그림들을 참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는 카라바조보다 약 10여 년 앞서 완성된 작품인 지롤라모 무지아노(Girolamo Muziano, 1532-1592)의 대형 제단화 <성 마태의 순교(The Martyrdom of St Matthew), 1586-89, Santa Maria in Aracoeli, Rome)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The Martyrdom of St Matthew>, Girolamo Muziano, 1586-89, Mural painting in oil, 320 x 350 cm, Santa Maria in Aracoeli, Rome
이 작품은 카라바조의 <성 마태의 순교>가 걸릴 콘타렐리 채플과 같은 로마 안에 있는 아라코엘리 성모 마리아 성당(Santa Maria in Aracoeli)의 제단을 장식하고 있다. 이들 두 작품을 크기 면에서 비교해 보면 무지아노의 작품이 320cm x 350cm이고, 카라바조의 작품이 323cm × 343cm이니 겨우 몇 센티 정도의 작은 차이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또한 두 작품은 구도 면에서도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자객의 위치와 동작이 서로 닮아 있고, 자객에게 죽임을 당하고 있는 성 마태의 위치가 거의 비숫하다. 또한 성 마태의 죽임을 목격하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구도면에서도 유사점이 있다.
하지만 시선의 처리 면에서는 두 작품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있다.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보는 이의 시선은 그림 중앙에 있는 자객과 성 마태에게 먼저 가게 되지만, 무지아노의 작품에서는 우측에 있는 사내의 망토와 좌측의 목격자에게 먼저 가게 된다. 카라바조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먼저 보고 그 주변을 살펴보도록 만든 것에 비해서, 무지아노는 주변을 먼저 살펴본 후 이야기의 주인공에게 시선이 향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해 카라바조의 작품이 보는 이로 하여금 정물화를 보는 듯 이야기의 주인공과 내용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반면, 무지아노의 작품은 풍경화를 보는 듯 편안하지만 다소 산만한 느낌이 들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카라바조가 종교화를 그리기 전에 정물화를 그렸다는 것에서 연관성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by Dr. Franz KO, NY(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isty(for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