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태의 순교>, <성 마태의 소명>, <성 마태의 영감>
델 몬테 추기경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으며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 스타일을 로마의 화단과 고위 성직자들 사이에 알리고 있던 카라바조에게, 그를 일약 거장으로 떠오르게 되는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로마에 있는 프랑스인들의 성당인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으로부터 콘타렐리 채플을 장식할 대형 제단화인 <성 마태의 순교>와 <성 마태의 소명>과 <성 마태의 영감>의 제작을 의뢰받은 것이다.
이 세 작품의 의뢰에 대해서는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600년, 교황 클레멘스 8세가 재위하고 있을 당시에 가톨릭 교회는 12번째의 희년을 맞게 된다. ‘성스러운 해’ 또는 ‘복된 해’라고도 하는 ‘희년(禧年, Jubilee)’은 25년을 주기로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해라고 할 수 있다. 희년은 또한 ‘성스러운 해’를 뜻하는 ‘성년(聖年)’을 가리키는 또 다른 말로 구약에 아노는 출애굽 사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관습에서 비롯되었다.
가톨릭 교회에서의 희년은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랬듯이 모든 사람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회복시켜주는 성스러운 해의 의미를 갖고 있다.
믿음이 있는 자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해방'과 원래의 온전한 상태로 되돌리는 '회복'이 희년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희년이 되면 로마의 거리는 순례자들로 넘쳐나게 된다. 로마 교황청은 희년을 기념하여 ‘죄로부터 큰 사면(대사(大赦)’을 베풀고 큰 축제를 성대하게 열어 세속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믿음과 경건함을 되찾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1300년 교황 파시오 8세 때부터 시작된 희년 행사는 처음엔 100년을 주기로 열리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후 교회의 상황과 여론에 따라 그 주기를 50년으로 조정하였다가 다시 33년으로 조정하였다. 그러다가 1425년에 있었던 다섯 번째 희년부터는 25년을 주기로 열리게 되었고, 1470년에 교황 바오로 2세가 칙서를 통해 25년을 주기로 희년을 여는 것으로 공식화하였다. 영어단어에서 25년째 또는 50년째 기념제(일)를 일컫는 단어인 ‘Jubilee’가 이 희년의 전통에서 유래된 것이다.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활동하기 바로 전에 있었던 희년은 교황 그레고리오 3세가 재위할 시기인 1575년의 11번째 희년인데, 기록에 따르면 이때에 유럽 각지에서 약 30만 명의 순례자들이 로마를 찾았었다고 한다. 당시의 유럽 인구와 이동 수단을 생각해보면 실로 엄청난 사람들이 희년을 맞이하여 ‘죄를 사하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해’ 로마를 찾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미국의 역사학자인 Jan De Vries의 추정에 따르면 러시아와 오트만 제국을 제외한 유럽의 인구는 1500년에 약 6,160만 명, 1550년에 약 7,020만 명 1600년에 약 7,80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 수치를 기준으로 보면 1575년에는 약 7,400만에서 7,500만 명의 사람들이 유럽에 살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유럽의 인구는 약 7억 4천 6백만 명이다. 따라서 11번째 희년이 있었던 1575년의 유럽의 인구는 현재의 약 10분의 1인 셈이다. 단순 계산만으로도 1575년의 순례객 30만 명이란 현재의 300만 명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거기에 당시의 교통 여건과 여행을 위해 수반되어야 하는 각종 조건들까지 고려한다면 가톨릭 교회의 사상과 문화를 기반으로 살아가던 사기의 ‘희년’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을지를 상상해 볼 수 있게 된다.
이제 1599년이 되었다. 희년이 가까이 다가왔다. 유럽 각처의 교회들은 바로 다음 해인 1600년에 맞이하게 될 희년을 준비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로마의 교황청과 교회들은 더욱 분주하였다. 이 희년을 놓치게 되면 다시 25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연로한 교황과 가톨릭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에겐 이 희년이 자신들의 삶에서 맞이할 수 있는 마지막 희년임을 알고 있기에, 그들의 최선을 다해서, 가진 것을 모두 쏟아부어서라도, 최고의 것들로 최고의 행사를 준비하려 하였다.
이에 따라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은 콘타렐리 채플을 장식할 제단화인 <성 마태의 순교>와 <성 마태의 소명>과 <성 마태의 영감>를 카라바조에게 주문하게 된다.
비록 카라바조가 이 작품을 의뢰받게 된 것이 주세페 체사리(Giuseppe Cesari)가 희년을 맞아 다른 작품들의 의뢰로 바빴기 때문이었긴 하지만, 카라바조는 콘타렐리 채플의 이 세 작품들에게 자신 만의 기법을 불어넣어 완성함으로써 그가, 그의 이전 고용주이기도 했던 체사리보다 훨씬 뛰어난 최고의 예술가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1599–1600,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