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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서성이기

경계에서 서성이기

초점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는 눈으로, 하늘 끝자락 아래에 울퉁불퉁 길게 그여 있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혼자서 응시하게 되는, 아주 지치고 힘든 하루를 보낸 저녁의 끝무렵이면,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하늘 저기 아래 어디인가에는, 멈춰 서야 하는 그곳이 분명 있을 거야. 걸음을 멈추게 되는 거기까지가 나의 한계이고, 그곳이 바로 세상이라 불리는 이곳의 경계일 거야.”


까마득하기만 했던 그곳이, 애써 걸어가다 보면, 몇 걸음 바로 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더 이상 걸음을 딛지 못한 채 몸을 웅크리게 된다.

“지금 이 자리가 경계의 언저리 어디쯤인 걸까.”


경계가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은 곧 하나의 끝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막연하지만 선명한, 지나온 어디인 가에서 부딪힌 적이 있는 것만 같은, 그래서 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예감이다. 뒤돌아가거나, 앞으로 계속 걸음을 딛거나, 어떻게든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경계의 가까이에 다다르면, 그렇다고 느끼게 되면, 뒤돌아서 가는 것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우물쭈물 망설이면서 아무런 것도 결정하지 못하게 된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되더라도 유난히 느려진 걸음을 인지하였을 땐 길어진 그림자가 발끝에 걸려 질질 바닥을 구르고 있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 경계가 가까울 땐, 어떡하든지 경계에게로 걸어가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라곤 없다.


어쩌면 경계는 어느 촌부의 남루한 집 허름한 벽면에 끼워져 있는 세월의 때 희뿌옇게 눌어붙은 네모난 좁은 유리창과 같이, 적당히 투명하면서도 적당히 흐린 모습을 가졌을 것 같다.

‘적당하다’는 것은 ‘적당한 만족’을 주는 ‘적당하게도 적당한’ 신기한 표현이다. 하지만 적당하게 맑고 적당하게 흐리다는 것이, 안과 밖을, 그리고 그것의 경계를 분간하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일 수 있다.


일순 인 가는 바람 한줄기에도 허둥거리게 되는 허술한 삶에서, 제대로 갖출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적당하게 갖추어진 적당한 삶에서 적당한 위안을 찾게 되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가끔은 그것이 저기 경계면 가까운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아서, 거기에서는 그것을 더듬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적당한 날을 찾아, 등가방을 적당하게 꾸려 메고 길에 나선다. 그 길에선, 아주 더 가끔은, 사납고 거친 돌풍을 만나기도 한다. 그 바람 속에서 눈을 찡그려가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돌풍과 나의 사이에 난 미세한 틈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작은 간극의 정체는 ‘케이아스(chaos)’라는 검은 블랙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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