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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서기 혹은 기생하기, 삶 기생하기 #2

홀로 서기 혹은 기생하기, 삶 기생하기 #2



홀로 서기 혹은 기생하기, 그것에 대해 첫 발을 디뎠던 것은 나름 글 좀 읽는다는 젊은 날의 사내라면 누구나가 저지를 법한 치기 어린 일종의 성장 의식 같은 것이었다고 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왠지 멋있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시절에 만약, 이 나이를 먹은 지금에까지도 그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고,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여전히 깜깜할 거란 사실을, 예감할 수 있었더라면 애초 그것에게 향했던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찌하면 홀로 설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무엇에 기생할 것인가, 인간은 홀로 설 수 있는 존재인가, 인간은 무언가에게 기생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인가."


그때에 던져졌던 질문에 대해 아직도 답이라 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고 있는 것은, 그것의 답 같아 보이는 것을 지나 온 언젠가는 더듬었던 것 같고, 이유처럼 보이는 몇 가지도 설핏 지나쳐 온 것 같다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어떤 개체 또는 어떠한 현상을 쫓다가 보면 그것에 다가선 것 같다는 느낌을 갖는 순간에, 여기저기에서 정신없이 터져 나오는 부조리한 상황을 부닥뜨리게 되기 일쑤이다. 그것의 크기와 정도는 상관없이 그 부조리한 상황 속을 헤매는 그때에도, 그것을 향해 더욱 깊숙이 발을 디디게 되는 것은, ‘정신적인 홀로서기’와 그것을 통한 ‘육체적인 홀로서기’를 하기 위한 도전의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홀로 선다는 것은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듯 쉽게 허락되지 않는 것이기에, 그 사실을 깨닫게 된 일부의 인간은 기생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다니게 된다. 결국 ‘스스로에 의한 홀로서기’는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 기생하기’에 이르러서야 적당한 타협점을 찾게 된다.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홀로서기는 기생하기에 붙여진 또 다른 이름표라 할 수 있기에 홀로 서려는 이는 기생하기에 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사실 기생한다는 것이 운명이나 꿈같은 실체 없는 것들과 관련된 것이기도 해서 여러 면에서 모호한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기생하기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본능은 밥을 먹고 숨을 쉬는 것과 같이 결코 변하지 않기에 인간의 기생하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기생하기가 인간과의 또는 사물이나 현상과의 ‘관계’라는 형태로 실체 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사람과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 현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더듬을 수 있기에, 사람에게 기생하기와 사물에게 기생하기, 현상에게 기생하기를 통해 홀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인간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내가 기생한다는 것은 기생당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 시절 골방 구석에서의 기생이 촉발한 홀로서기는 아직도 멈추지 못하고 길을 가고 있다.

“나는 관계한다 따라는 나는 기생한다.”

“나는 기생한다 따라서 나는 언젠가는 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때에 던져진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답일 것 같은 것'이고 '이유 같은 것'이기도 하다.

"나는 관계의 인간이다. 따라서 기생하고 기생당하는 인간이다."


by Dr. Franz KO(고일석, Professor, Dongguk University(for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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