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좋은 시간

커피가 좋은 시간

이 시간이 되면 왜 이런 걸까. 왜 커피가 좋아지는 걸까. 물안개 자욱하게 낀 수정체를 투과한 추억이, 짙은 갈색의 호수에 먹먹하게 녹아들고 있기 때문일까.

짧고 긴 두 개의 시곗바늘이 하늘을 향해 하나로 모여 서는, 어제의 끝 시간이자 오늘의 첫 시간이, 기억에만 남아 있는 어느 날의 한 때처럼 일순 지나가 버렸다. 살다 보면 알게 된다. 모든 지나침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소파에 길게 누였던 몸을 일으켜 세워 드롱기 커피머신의 버튼을 누른다. 향 좋은 에스프레소 커피 줄기가 속 하얀 잔에 흘러내린다. 둥글게 안겨든 온기를 손에 감싸 쥐고, 등불 하나 희미하게 밝힌 서재의 창가에 앉는다.


커피를 마시기 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것인지, 잠이 오지 않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는 것인지, 애써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 시간이면 커피를 찾곤 하는 것은, 피하고 싶지 않은 지병 같은 것이다.

모락모락 피어오른 커피 향을 팔레트 가득 으깨어 어둠에 덧칠한다.


“짙은 브라운 컬러와 밤의 외로움, 그리고 커피의 향기는 같은 뜻을 가진 다른 단어가 아닐까.”

같은 색을 가졌지만 서로 다른 세상을 표현하고, 같은 감상을 불러일으키지만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이 개체들은, 지나 온 삶의 궤적을 뒤돌아 보게 하는 영혼의 주술들이다.


간혹은 그 강한 이끌림이 두렵기만 하다. 주술이 깊어질수록 호흡이 불규칙해진다. 살아오는 동안 받아들인 무수한 두려움들 중에는 시간의 흐름조차 풀어내지 못하는 것이 있나 보다. 그런 것은, 그냥 안고 살아가야 할 수밖에, 그냥 품을 수밖에, 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 지금은 커피가 좋은 시간이다. 미세혈관 구석구석 퍼진 갈색의 빗물에 밤 잠을 다독여야 할 시간이다.


A Cup of Coffee_Victor Gabriel Gilbert .jpg

[A Cup of Coffee](1877–1877, 46 x 38.1 cm), Victor Gabriel Gilbert (French, 1847–1933)

프랑스 화가 빅토르 가브리엘 질베르의 [커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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