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커피가게, 카페 플로리언

베네치아의 커피가게, 카페 플로리언


1.

진파랑 잔파도가 일렁이는 물길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저기 바다 어딘가에서 아드리아의 노랫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그 행복한 울림을 따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한 줄기 꽃향기를 쫓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 아름다운 섬에는 향기 진한 꽃 한 송이가 300여 년 동안 지지 않고 피어있는데 사람들은 그 꽃에게 카페 플로리안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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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를 얘기하면서 카페 플로리안을 빼놓아서는 안 되겠다. 1720년 산마르코 광장의 지금의 자리에 첫 문을 연 카페 플로리안은 베네치아 하늘의 햇살로 꽃망울을 맺고 아드리아 바다의 물방울로 꽃잎을 터트린 베네치아의 꽃이다.


처음엔 ‘승리를 자랑하는 베네치아’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지만 카페 주인인 플로리아노의 이름을 따라서 플로리안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오래전 언젠가의 얘기 따위는 그저 지나가던 바람의 의미 없는 수다인 양 흘려들어도 좋을 것 같다.


300여 년이라니 그 기나긴 시간 동안 모질고도 거칠었을 세월의 풍파를 어떻게 견뎌낸 것일까. 카페 플로리안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플로럴 한 그 낭만적인 이름에도 있지 않을까. 플로리안이란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랬더라면 카페 플로리안 또한 시간의 색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그 시절의 다른 카페들처럼 그저 기록 속에나 남겨지지 않았을까.


행여 누군가 훔쳐 들을까 봐 조심스레 너에게만 속삭인다.

“다행이야, 너를 플로리안이란 이름으로 부를 수 있어서, 너에게서는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향기가 나거든.”



2.

세월의 흔적을 장식처럼 꾸며 붙인 것 같은 나무 문 앞에 선다.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이 닿았을 손잡이를 살며시 안으로 밀자 달콤하고 향긋한 마중 인사가 커피에 목마른 여행자의 가슴을 뜀박질하게 만든다.

금박 무늬를 곱게 올린 벽이며 중세풍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천장을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잘 차린 커피 한 세트가 오래된 은쟁반 위에 살포시 내려와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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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플로리안의 커피


솜구름 같은 크레마를

둥그런 입술에 가득 두르고

달콤한 초콜릿을 듬뿍 토핑해 넣은 너를

그저 카페 플로리안의 커피라고만

입술이 속삭일 뿐이니

어떡하랴

나의 부족한 언어를 탓할 수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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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플로리안의 커피 한잔에는 이탈리안 여인의 미소 같은 신맛과 잔파도 일렁이는 아드리아 바다의 풋풋한 떫은맛에 햇살 좋은 베네토 들판의 쌉쌀한 쓴맛과 성전의 돌담에 낀 마른 이끼의 알싸하고 구수한 맛이 우아하게 어우러져있다. 거기에 300년을 숙성한 초콜릿의 달콤한 마법이 더해지니 마치 잘 차려진 생일상을 받은 듯해서 몸과 마음이 구름다리를 건너는 것같이 들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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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빛깔 고운 붉은 벨벳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으니 얘기가 조금은 길어진다 해도 괜찮겠다.


수다란 게 흔히 여자들만의 전유물로 여겨지곤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늦은 밤까지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남자들에게선 시끄럽다 못해 허풍 가득 낀 거만함이 방향 없는 이야기에 살을 잔뜩 붙여 넣기 일쑤이다.

게다가 간장종지만 한 에스프레소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이 얘기 저 얘기, 별것도 아닌 것을, 끊이지 않고 떠들어대고 있는 이탈리안 사내들을 만날 때면 수다라는 단어에 대한 선입견에서 벗어나게 된다.



3.

단지 ‘카페’라는 단어 하나로 카페 플로리안을 이해하려는 것은 분명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욕심일 수 있다. 3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을 산마르코 광장의 안주인으로서 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카페 플로리안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페를 폐쇄적이면서 개인적인 공간으로만 여기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본다면 카페는 사상과 철학, 예술과 문학이 탄생하고 교류된 창작과 소통의 열려있는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카페 플로리안이 중세라는 멀고 긴 터널을 벗어나고 있던 근세의 유럽에서 인문학과 새로운 사조의 형성과 융성에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나 또한 그들 중에 한 명이기에 이 견해에는 카페 플로리안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의 주관이 반영되어있음을 애써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바이런과 괴테, 루소와 몽테스키외, 디킨스와 스탕달 그리고 상드와 같이 문학과 예술, 철학의 별들이 이곳 카페 플로리안에서 사색과 토론을 즐겼다고 전해지니 유럽의 사상과 인문학에 미친 카페 플로리안의 역할을 너무 낮게만 평가하려는 것 또한 객관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카페


카페는 수다의 공간이다

입의 수다든 생각의 수다든

즐거운 수다도 슬픈 수다도

고독하면 고독한 대로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어제의 그것과 오늘의 이것

그리고 내일의 저것을

길어지는 수다 속에 풀어내는

갇힌 교류의 공간이, 카페이다


카페 플로리안의 진하면서도 달콤한 에스프레소에 취해버린 나의 가슴은 별빛이 반짝이는 아드리아 밤바다의 잔물결 위를 떠다닌다. 어쩌면 눈을 뜬 채로 깜빡 졸았는지도 모르겠다.


유리창 밖에서 누군가를 본 것 같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무언가를 읽다가 쫓긴 듯 문밖으로 뛰어나간다. 산마르코 광장의 돌바닥에서 그 또는 그녀의 비밀 얘기가 반질거린다. 끊겼다가 이어 붙인 필름 토막이 영사기에 걸려 돌아가듯 덜커덕, 한 줄기 빛이 환하게 조사된다. 갈색 빛깔 투명한 커피 안개 스크린에 누군가의 영상이 걸린다.



4.

카페 플로리안의 패브릭 의자에 앉아 산마르코 광장에 가득 차오른 바닷물이 아침햇살을 여유롭게 반사하고 있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으니 나의 삶에도 뭔가 반짝이는 것이 차오를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이, 남아있는 나의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간일 거야.”


하긴 다가올 매 순간이 나의 남은 삶에서 가장 풋풋한 한때일 것이기에 지금 이 순간은 분명 나의 인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시간인 것이다.

금빛 테두리를 둥글게 두른 하얀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댄다. 삶은 쓰고도 시고 떫으면서도 달콤한 카페 플로리안의 커피 맛을 닮은 것 같다.


“초콜릿 몇 방울을 더 토핑 해야겠다.”


쓰지만 달콤하고 시지만 부드럽고 떫지만 향긋한 추억이 창밖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베네치아를 살아간 그들에게도 삶이란, 에스프레소처럼 강한 그 무엇이어서 달콤한 초콜릿을 듬뿍 토핑 해야만 했던 것일까.”


누군가의 입술자국이 이 잔에 남겨져있을 것 같다. 혹시 여기쯤에 조르주 상드의 붉은 립스틱 자국이 남아있지 않을까. 헤르만 헤세의 굳게 닫혔던 입술이 이 잔 모서리 여기쯤에서 살짝 열리지 않았을까. 낡은 잔 귀퉁이에서 그녀와 그의 호흡을 더듬는다.


지금껏 자리 잡아 살아온 그곳으로 돌아가면, 이탈리안 에스프레소에 길들여진 혀의 감각을 말갛게 내린 더치커피 한잔으로 씻어 내려야겠다. 중력에 순응하며 인내로 내려진 눈물 같은 연갈색의 커피를 한 방울 한 방울 입 안에 적셔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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