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 파리의 영원한 견자見者

랭보, 파리의 영원한 견자見者


랭보는 이곳 파리에서 무엇을 기다린 것일까. 그 기다림의 끝자락에서 만난 것이 아프리카였던 것일까. 랭보가 기다린 것이 아프리카라면, 그곳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고자 한 것일까. 어쩌면 랭보에게 아프리카는, 또 다른 파리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랭보는 아프리카에서도 결코 파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다.


그가 파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은 이곳 파리에, 젊은 그를 사로잡았던 무엇인가가 분명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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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한다는 것은 그곳에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곳에 속한다는 것'이기에, 어떤 것이 영원히 파리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영원히 파리에 있으면서 또한 영원히 파리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렇다면 랭보에게 있어 '그것'이란 대체 무엇이었던 것일까.


랭보 스스로가 말한 것처럼 ‘시적 표현에 자유를 주기 위해, 생각과 말을 글로 표현할 수 있게 어휘를 확장하는 것, 무엇인가를 상징적으로 보편화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를 찾아내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 것이, 그의 몸과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던 파리의 역할이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랭보의 그것은, 랭보를 파리의 시인으로 만든 것은, 바로 파리 그 자체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파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파리가 파리에 있으며, 또한 파리는 파리에 속한다는 것이 된다. 그렇기에 랭보에게 파리는 영원한 파리이고 랭보가 파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파리가 아직도, 그의 가슴과 몸을 달구고 있다는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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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궤적을 쫓아 분석하려는 비평가들이나 망망한 그의 시의 세계를 항해하려는 문학가들이 즐겨 인용하고 있는 랭보의 문구가 있다.


“시인은 모든 감각의 오래되고도 거대한, 이론적인 뒤틀림에 의해 보는 자(견자)가 된다."


이 표현은 랭보가 쓴 '견자의 편지(The Letters of the Seer 또는 The voyant letters (프랑스어로는 Les lettres du voyant), 1871)'에 나온다.(One was written to Georges Izambard, a second to Paul Demeny)


학자들은 이것을 랭보의 ‘보는 자(견자見者, voyant)) 시론’으로 해석하고 있다. 스물의 젊은 시절 나는 이 ‘보는 자’를 ‘보려는 자’로, 때론 ‘알려고 하는 자’로 해석한 적이 있다. 한낱 범인에 범인에 불과한 그 시절의 나에게 ‘보는 자’의 경지는 언젠가 랭보처럼 도달해야만 할 이데아(Idea)였을 뿐이었다.


그러니 보려는 자로서, 알려는 자로서의 길을 걸어가다가 보면 혹시 먼 길 나선 랭보의 뒷모습이나마, 파리의 어둑어둑한 어느 골목길에선가 또는 에티오피아의 황량한 들판 어디에선가 어렴풋하게라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기대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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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의 상징주의적인 어휘의 선택과 표현 방식은 과학과 학문이 걸어온 궤적과 그 방법론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물결을 지나오면서 인간과 인간의 내면에 대해 눈을 뜬 과학과 인문학은 진리와 세상의 법칙을 규명하려는 ‘보려는 자’와 ‘알려는 자’들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다.

이를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이었다기보다는 신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앞선 자’들의 노력 같은 것이었다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과학의 탐구와 문학적 탐구를 같은 선상에 두려는 것은 ‘보려는 자’가 되기 위해, 때로는 ‘알려는 자’가 되기 위해, 먼 길조차 마다하지 않고 걷고 있는 한 여행자의 지나친 주관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크게 상관할 바는 아니다. 레오나드 다 빈치에게 과학은 곧 예술이었듯이 랭보에게 과학은 바로 그의 문학이었다고, 주관적으로 여겨도 될 것이기에.


“그 주관을 어떻게 하면 객관이 되도록 할 수 있을까. 그때쯤이면 여행자의 발걸음이 가벼워지게 될까.”


어찌 되었건 간에 랭보가 보려고 한 것을 텍스트에 담아 암시적으로 기술한 것이 그의 시이고, 후세는 랭보의 그 행위를 ‘언어의 연금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랭보는 <파리의 연금술사>인 것이다.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데 막상은 아무렇게나 흘리고 다닌 것 같아 보이는 그의 거칠고 바람 찬 삶과 언어의 잔해들은, 서툴게 그러나 자유롭게 삶을 살아간 한 천재의 구도 방법이었고, 길 잃은 알려는 자의 생존 본능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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