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조가 살아가던 시대의 이탈리아 반도는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 교황령과 같은 다섯 개의 강국과 페라라, 모데나, 제노바 등과 같은 여러 군소국들이 그들이 위치한 지역의 거점 도시들을 중심으로 경제와 정치적인 지배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1592년, 21살이 된 카라바조는 어린 시절에 살던 카라바조 지역이 가까이에 있으면서, [시모네 페테르자노 화실]의 도제 생활을 통해 그를 화가로서 거듭나게 만들어준 이탈리아 북부의 거점 도시인 [밀라노]를 떠나 세상의 중심이자 문화와 예술의 중심인 [영원의 도시 로마]에 도착하였다.
당시의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서 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를 놓고 보더라도 아주 특별한 도시였다. 프랑스나 스페인과 같이 국왕에 의해 통치되고 있던 [왕정 국가]들이나,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같이 지역의 군주가 지배하고 있던 [군주 국가]들과는 달리, 로마는 로마라는 도시를 포함하여 [교황령]이라는 넓은 영토를 교황과 교황청이 직접 통치하고 있던 종교 국가의 수도였다.
역사적으로 중세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카라바조가 살아간 시대의 교황과 교황청은 정치에서 만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 및 사회 전반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특히 예술에 있어서 교회의 영향은 더욱 지대했는데, 그러한 영향력은 당시 교회가 가졌던 막강한 정치적인 권력과 종교적인 지배력, 축척된 금전의 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카라바조 당대의 예술가 뿐만이 아니라 중세시대에 활동했던 예술가 누구나가 교회와 고위 성직자의 후원과 의뢰를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로부터 고위 성직자와 같은 교회 관계자의 초상화를 의뢰받는 것과 제단화와 같은 종교화를 의뢰받는 것, 교회 내부에 거치될 조각 작품의 제작을 의뢰받는 것, 종교 행사에 사용할 음악의 작곡을 의뢰받는 것은 중세시대의 예술가를 성공의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하는 마법의 열쇠와도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카라바조의 작품 세계를 좀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라바조가 태어나고 살아가던 시기의 교황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라바조가 태어난 1571년에서 1610년 불과 '서른여덟과 십 개월'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세상을 떠날 때 년 까지는, 225대 교황 [비오 5세]에서부터 233대 교황 [바오로 5세]까지 아홉 명의 교황이 교회의 수장으로 재위한 격동의 시대였다.
[교황 비오 5세](라틴어: Pius PP. V, 이탈리아어: Papa Pio V)는 제225대 교황(재위: 1566년 1월 7일 - 1572년 5월 1일)으로 가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된 교황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해 반종교 개혁과 [라틴식 로마 전례]를 표준화시켰으며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교회 박사로 선포하였고 교회 음악 작곡가인 [조반니 피에르루이지 다 팔레스트리나]를 후원하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라틴어: Gregorius PP. XIII,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XIII)는 제226대 교황(재위: 1572년 5월 13일 - 1585년 4월 10일)으로 태양력인 [그레고리오력]을 제정한 교황이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 안에 [그레고리오 경당]을 지었으며 1580년에는 [퀴리날레 궁전]을 확충하였다. 교회 내부의 개혁을 추진하여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을 구체화시켰으며 [예수회]를 적극 지원하였다.
[교황 식스투스 5세](Pope Sixtus V, 식스토 5세(라틴어: Sixtus PP. V, 이탈리아어: Papa Sisto V)는 제227대 교황(재위: 1585년 4월 24일 - 1590년 8월 27일)으로 로마와 교회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남긴 교황이다. "통치자는 일을 하다가 죽어야 한다."는 말을 남긴 그는 사후 긍정적인 면에서와 부정적인 면에서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가 이룬 업적은 카라바조가 활동하던 시기의 중요 토대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문헌에서는 "카라바조가 [교황 식스투스 5세]에 의해 발전을 '이룬 시기'에 로마에 도착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일부 문헌에서는 "카라바조가 [교황 식스투스 5세]에 의해 발전을 '이루던 시기'에 로마에 도착했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카라바조와 [교황 식스투스 5세]의 연결고리를 확인하지 못해서 발생한 억측일 뿐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카라바조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1592년이고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사망한 것은 1590년이다. 따라서 카라바조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교황 식스투스 5세]가 사망하고 약 2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 뒤로 228대 [교황 우르바노 7세](라틴어: Urbanus PP. VII, 이탈리아어: Papa Urbano VII, 재위: 1590년 9월 15일 - 1590년 9월 27일), 229대 [교황 그레고리오 14세](라틴어: Gregorius PP. XIV, 이탈리아어: Papa Gregorio XIV, 재위: 1590년 12월 5일 - 1591년 10월 15일/16일), 230대 [교황 인노첸시오 9세](라틴어: Innocentius PP. IX, 이탈리아어: Papa Innocenzo IX, 재위: 1591년 10월 29일 - 1591년 12월 30일), 231대 [교황 클레멘스 8세](라틴어: Clemens PP. VIII, 이탈리아어: Papa Clemente VIII, 재위: 1592년 1월 30일~1605년 3월 3일), 232대 [교황 레오 11세](라틴어: Leo PP. XI, 이탈리아어: Papa Leone XI, 재위: 1605년 4월 1일 - 1605년 4월 27일), 233대 [교황 바오로 5세](라틴어: Paulus PP. V, 이탈리아어: Papa Paolo V, 재위: 1605년 5월 16일 - 1621년 1월 28일)가 카라바조가 살아가던 시대에 교황으로 재위하였다.
이들 중에서 재위 기간이 1592년 1월 30일부터 1605년 3월 3일까지인 231대 [교황 클레멘스 8세]와 그 뒤를 이었지만 재위 기간이 불과 27일(1605년 4월 1일 - 1605년 4월 27일)에 불과했던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인 232대 [교황 레오 11세]는 카라바조가 화가로 성장하고, 로마에서 거장으로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재위한 교황이다. 그 다음을 이은 [교황 바오로 5세]는 카라바조가 도피생활을 시작한 1606년에서부터 1610년에 사망할 때까지 재위하고 있었기에, 카라바조가 그토록 애원하고 갈망하던 [사면장]에 직인을 찍을 수 있던 교황이었다.
이탈리아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역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교황청에 255대 교황인 [비오 5세]가 재위하기 시작한 1566년에서 233대 교황인 [바오로 5세]의 재위가 끝난 1621년 까지 무려 9명의 교황이 재위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당시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성장한 인본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중세라는 긴 터널을 빠져나오고 있었을 거라는 점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또한 흑사병이라는 비극적인 질병이 14세기뿐만이 아니라 15세기에서 17세기까지 약 사백 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이탈리아와 유럽 전역을 비탄에 빠지게 했던 시대적 상황과 맞물린 교회 내부의 격변이 카라바조가 살았던 시대에 있었을 사회적 변화와 정치적 변화 및 문화와 예술의 변화에 어떤 식으로든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사실 또한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젊은 카라바조가 도착한 로마에서는 사상적인 자유로움과 인문학에 대한 높아진 관심으로 인해 종교적인 그림뿐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그림 또한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금전적인 성공과 함께 문화와 예술적으로도 성장한 부유한 개인이 소유한 대저택이 증가하였고,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인본주의 사상]과 [인문학적인 지식]을 겸비한 부유한 지식인 층을 중심으로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개인 컬렉터들이 늘어나 예술 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또한 이러한 새로운 시대적 요구를 바탕으로 기존의 [스투디올로](studiolo, 스튜디올로, 오늘날의 스튜디오)가 확장된 개념인 [갤러리]가 나타났다. [스투디올로]가 부유한 지식인의 저택에 마련된 서재와 같이 개인을 위해 꾸민 내적인 공간이라면 [갤러리]는 귀족과 부유층이 자신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 작품으로 화려하게 꾸민 외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나타난 [갤러리]는 점차 재력과 교양을 갖춘 고급 사교문화의 중심이 되어갔으며 이 특별한 공간을 채우기 위한 미술 작품의 수요 증가는 로마의 예술을 꽃피우게 하는 새로운 동력이 되었다. 인문학과 인본주의 사상의 발전으로 인해 미술 작품의 주제 또한 다양해졌으며 이동이 가능한 작은 작품에 대한 수요는 인물화와 풍경화와 같은 이젤화가 유행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