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9년 스물여덟의 카라바조에게 일약 로마 미술계의 거장으로 떠올라,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온다. [콘타렐리 채플(Contarelli Chapel)]을 장식할 두 개의 대형 제단화인 <성 마태의 순교>(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323 cm × 343 cm, 1599–1600,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와 <성 마태의 소명>(The Calling of Saint Matthew, 322 cm × 340 cm, 1599–1600,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의 제작을 의뢰받은 것이다.
<성 마태의 순교>(The Martyrdom of Saint Matthew), 323 cm × 343 cm, 1599–1600,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
<성 마태의 소명>(The Calling of Saint Matthew), 322 cm × 340 cm, 1599–1600, Contarelli Chapel, San Luigi dei Francesi, Rome
사람에 따라서는 [콘타렐리 예배당]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르고 있는 [콘타렐리 채플]은 [마테오 콘타렐리 추기경](1519–1585, Cardinal Matthieu Cointerel))의 이탈리아어 성(family name)인 콘타렐리(Contarelli)에서 그 이름을 따온 채플(예배당)로, 예수의 열 두 제자 중에 한 사람이자 [마테오 콘타렐리] 추기경의 수호성인인 성 마태(마테오)에게 헌정된 채플이며, [마테오 콘타렐리] 추기경이 1985년에 사망하면서 남긴 자금을 바탕으로 1600년에 완성한 로마 주재 프랑스 성당인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San Luigi dei Francesi) 안에 있는 예배당이다.
[콘타렐리 채플]의 제단화를 그리게 된 것은 화가 카라바조가 거장으로써 명성을 얻게 된 시작점이자 가장 중요한 사건이기에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카라바조에게 이 두 작품의 제작 의뢰가 있기 약 14년 전인 1585년에, 로마 교황청의 추기경이었던 [마티오 코인텔](Matthieu Cointerel, 이탈리아어로는 [마테오 콘타렐리](Matteo Contarelli))은 그의 유언장에서, [성 마태]와 관련된 주제로 [콘타렐리 채플]을 꾸미라는 구체적인 지침과 함께 이에 필요한 자금을 남겼다. 추기경의 이름 [마테오]는 자신의 수호성인인 [성 마태]의 이탈리아식 이름에서 유래한 세례명이다.
[성 마태]를 주제로 한 이 두 개의 작품이 [콘타렐리 채플]의 제단에 걸리기 전까지 [콘타렐리 채플]의 돔에는 카라바조의 전 고용주이자, 당시 로마에서 가장 인기 있는 매너리즘 화가(Mannerist)였던 [주세페 체사리](Giuseppe Cesari, 1568-1640)의 [프레스코화]가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료를 살펴보면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지] 성당 측에서는 먼저 [주세페 체사리]에게 작품의 제작을 의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주세페 체사리]가 여러 왕족들과 교황청에서 의뢰받은 작품들로 인해 더 이상 다른 작업을 맡을 수 없을 만큼 바빴기에, 이에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는 바티칸 사무국의 감독관이자 카라바조의 후원자였던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이 이 일에 관여하면서 카라바조에게 작품을 의뢰하도록 만든 것이다.
이 두 개의 그림은 카라바조가 로마의 주요한 교회로부터 제작을 의뢰받은 첫 번째 작품들이었다. 카라바조는 이 두 개의 그림을 성공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일약 로마 화단의 스타로 떠올랐다. 결국 [콘타렐리 채플]의 제단화를 그린 것은 '예술가 카라바조'를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 [영원의 도시 로마]에 [콘타렐리 채플]이 있었기에, [마테오 콘타렐리 추기경]의 유언과 유산이 있었기에, [주세페 체사리]가 다른 일들로 바빴기에, 그의 후원자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이 로마 교황청의 재산을 관리하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기하게도 이런 모든 상황이 누군가 미리 예비한 듯 한꺼번에 맞아떨어졌기에, 카라바조라는 예술가가 탄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개의 작품 <성 마태의 소명>과 <성 마태의 순교>는 지금도 [콘타렐리 채플]의 중앙 제단 측면 상단에 서로를 마주 보며 걸려 있다. <성 마태의 순교>를 먼저 그리기 시작하였지만 <성 마태의 소명>이 먼저 완료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제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진 천재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의 적극적인 도움이 없다면, 자신의 때가 오지 않는다면, 그때를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그만을 위한 선명한 계기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시간의 흐름 속을 지나간 어느 날의 한 줄기 바람처럼,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그저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콘타렐리 채플]의 제단화 <성 마태> 연작을 그리게 된 것은 카라바조라는 젊은 사내를 '천재 예술가 카라바조'일 수 있게 해 준, 오직 그만을 위해 완벽하게 준비되고 제공된 운명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카라바조에게 그의 전성기를 안겨다 준 것은 무엇보다도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의 전폭적인 후원과 영향력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카라바조 또한 그의 기대에 걸맞은, 아니 그것보다 훨씬 넘칠 만큼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자신에게 찾아온 이 기회를 흔들림 없이 꽉 움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로서 카라바조는 서양 예술사에서 자신만의 문을 활짝 열었고, 자신의 전성기로 들어서게 된다.
두 개의 작품 <성 마태의 순교>와 <성 마태의 순교>는 1600년 완성과 함께 로마의 예술계와 주요 교회들 사이에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카라바조에게 후원과 작품의 의뢰가 끊이지 않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에게 찾아온 이 새로운 기회를 성공적으로 잡은 카라바조는 이제 그토록 꿈꾸던 자신만의 예술을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