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카라바조의 로마에서의 초기 생활

11. 카라바조의 로마에서의 초기 생활



사제 [판돌포 푸치]를 만나다

화가로서 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만 같은 생활을 근근이 이어가고 있던 카라바조에게 로마에서 정착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막강한 집안이었던 [코론나 가문]의 주선으로 사제 [판돌포 푸치](Pandolfo Pucci)의 집에 머물면서 그를 위해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사제 [판돌포 푸치]는 [교황 식스토 5세](Pope Sixtus V, 1521–1590)의 여자 형제의 재산 관리인(Steward)이었으며, 그 또한 카라바조와 마찬가지로 '로마에서의 성공'을 꿈꾸던 인물이었다.


[교황 식스토 5세]의 그 여자 형제는 교황이 사망한 후에 로마를 떠나 가문의 주된 활동 지역인 [팔라초 코론나](Palazzo Colonna)로 거주지를 옮겨갔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이 몇 년도였는지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남겨진 기록들을 기반으로 추측해 보면, [교황 식스토 5세]가 사망한 것이 1590년이고, 카라바조가 로마에 도착한 것은 1592년이었기에, 카라바조가 푸치를 만났을 때 이미 그녀는 로마를 떠나 [팔로초 코론나]로 완전히 옮겨갔거나, 적어도 로마에 있던 그녀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정리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 ***


사제 [판돌포 푸치]를 위해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 덕분에 비록 일정한 거처가 생겼다고는 하지만, 육체적인 면에서 만이 아니라 예술적인 면에서도 카라바조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카라바조에게는 예술가로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보장되지 않았고, 제공되는 음식이라고 해봐야 '샐러드'가 전부라고 불평할 정도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결국 카라바조가 사제 [판돌포 푸치]의 집에 머무는 동안 한 일이라곤, 그의 입신양명과 새로운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헌정용 그림'이거나 '헌정을 위한 복사본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사제 [판돌포 푸치]가 카라바조를 이렇게 대우한 것에 대해서, 그가 원래부터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당시 [판돌포 푸치]가 처해있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해보면, 카라바조를 그렇게 밖에는 대우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또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판돌포 푸치]의 입장에서는 1590년에 [교황 식스토 5세]가 사망하자 그가 재산을 관리하고 있던 교황의 여자 형제가 로마를 완전히 떠났거나 적어도 거의 떠나버렸기에, 그의 주된 수입원이 끊겨버렸을 것이다. 또한 사제 [판돌포 푸치]에게 있어 '그녀의 귀향'은 교황청과 고위 성직자들과의 연줄이 사라져 버렸거나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자신이 가진 한정된 자산 내에서 새로운 성공을 위해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이다.


결국 카라바조의 입장에서 보면 사제 [판돌포 푸치]를 만나 그의 집에 들어간 것은, 로마에서 카라바조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회라고는 할 수 있지만, 그 기회란 것이 단지 먹을 것과 거처를 해결하는 현실적인 것이었을 뿐, 예술가로서의 그를 성공으로 이끌어 주는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꿈을 꾸는 자유로운 예술가로

제대로 된 후원자를 찾지 못한 채 사제 [판돌포 푸치]의 집에서 그를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던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공한 기성 화가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오직 먹을 것과 머물 곳을 찾기 위해, 자신의 재주를 팔아야만 하는 보잘것없는 그림쟁이로 전락한 듯한 비참함을 느꼈을 것이다.


예술가로서 아무런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던 카라바조는 결국 사제 [판돌포 푸치]의 집을 떠나 로마의 화실들을 전전하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카라바조가 거쳐간 화실 중에는 카라바조의 평생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십 대의 [마리오 민니티](Mario Minniti, 1577 – 1640)를 만난 [로렌초 시칠리아노](Lorenzo Siciliano)의 화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절의 카라바조와 [마리오 민니티]는 비록 기성화가의 화실에 소속되어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일개 무명 화가의 신분에 불과하였지만, 그들에게 주어져 있는 환경보다 더 이상적인 것들을 갈망하였으며, 부과 명성이라는 커다란 목표의 달성과 예술가로서의 독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함께 생활하였다.

카라바조보다 6살 연하인 [마리오 민니티]는 카라바조의 1593년 작품 [과일 바구니를 든 소년](Boy with a Basket of Fruit)의 모델이며 1606년 이후에는 자신의 고향인 시칠리아(Silily)에서 지역화가로 활동한 [바로크 화가]이다. [마리오 민니티]의 작품을 보면 그 또한 카라바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여러 화실들을 옮겨 다닌 카라바조와 [마리오 민니티]는 무명의 화가들에게 제한적인 로마의 예술 환경에 대해 불만을 느꼈다.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꿈꾸며 찾아온 로마에서 예술적인 독립과 성공을 위한 무명 화가들의 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로마라는 화려하고 거대한 벽'에 부딪힌 채 좌절해야만 했다.


아름답고 향기 강한 꽃에는 더 많은 나비와 벌이 찾아들기 마련이다. 꽃이 화려할수록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는 것처럼, [영원의 도시 로마]는, 비록 모든 예술가들을 향해 문은 열려있지만, 그 문은 이미 성공을 거둔 기성 예술가들과, 새로운 경쟁에서 승리한 오직 극소수의 신규 예술가들에게만 열려 있었다.


카라바조는, [교황 클레멘스 8세](Clemens PP. VIII, 1592 - 1605)가 가장 아끼던 화가인 [주세페 체사리](Giuseppe Cesari, 1568 - 1640)의 공장과도 같은 작업장(화실)에서 [꽃과 과일]을 그리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또한 [체사리 형제]와 어울려 지내면서 뒷골목 같은 길거리에서 패싸움을 벌리기도 하였다는데,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 형제와 관련된 어떤 사건 이후에 [주세페 체사리]의 화실과 인연을 끊었다고 하는 것에서, 그 사건이 어땠을지는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게 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0. [영원의 도시 로마]에 첫발을 디딘 카라바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