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카라바조의 빛과 어둠, 그리고 인간의 이중성

16. 카라바조, 빛과 어둠으로 인간의 이중성을 그려낸 화가



"빛은 인간이 지닌 이중성의 근원이다."


빛과 어둠의 강렬하면서도 극적인 대비는 인간의 이중성을 완전히 벌거벗겨 놓는 듯하다. 낮의 밝음 속과 밤의 어둠 속을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피조물에게 주어진 운명이기에, 그것의 원인이 신에게 있건 자연에 있건 간에, 인간의 심사는 원래부터 이중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 비록 이중성이 인간의 본능이긴 하지만, 인간의 이중성은 어떤 하나의 현상만을 따르지는 않기에, 인간 스스로는 자신의 이중성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인간은 자연계를 살아가고 있지만 자연계의 법칙을 거스르려는 본능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의 신경이 인지할 수 있는 '형상'이란, 자연계의 어떤 사물에 있어 그 순간에 발현되어 있는 '경계의 형태'를 감각이 읽어낸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감각이 읽은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그것의 형상'이라고 단정 짓는다면 '일반화의 함정'에 빠져 예기치 않은 오류를 발생시킬 우려가 생겨날 수 있다.


인간에게 있어 '없는 것(無)'과 '있는 것'(有)이란, 신경이 인지할 수 있는 [임계점](threshold point)을 기준으로, 정량적이거나 정성적인 정도의 차이를 극과 극으로 표현한 것이다. 인간이란, 비록 '있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자신이 설정한 임계점을 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없는 것'이라 치부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없는 것이란 있긴 하지만 인지의 임계점을 넘지 못하는 것'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자연계의 입장에서는 존재하는 것이 분명한 것일지라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인간의 인지만이 존재의 유와 무를 결정짓는 유일한 척도인 것이다.


*** ***


"카라바조의 작품 앞에 서면, 지금껏 살아온 세상과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 낸, 무수한 임계점을 돌이켜 보게 된다."


카라바조는 어둠과 밝음의 극적인 대조를 통해 드라마틱한 효과를 그림에 불어넣은 [명암법](Chiaroscuro, 키아로스쿠스)과 그것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테네브리즘](Tenebrism)의 대가이다.

빛과 색, 붓이라는 오브제를 도구 삼아 캔버스라는 작고 좁은 이차원의 공간을 자유로이 유영한 카라바조의 그림에서의 어둠은 결코 날을 세운 경계를 만들어 내질 않고, 시나브로 스러져가다가 부지불식의 어느 곳에 선가부터는 밝음을 향해 점차 나아가고 있기에, 색의 입자 하나하나를 아무리 세밀하게 쫓더라도 그 터닝 포인터를 찾아내지 못하게 될 수 있다.


"카라바조의 그림에서의 색은 빛을 담은 미로일 수도 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라면, 변화는 어느 한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변화는 그 또는 그녀의 곁에서 늘 있어온 것인데도 막상 그것이 임계점을 넘기 전까지는 변화라고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누군가 "변화가 한순간에 갑작스럽게 찾아왔었다."라고 말을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주변에 늘려있던 변화의 낌새를 외면하며 버티다가, 또는 인지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애써 인지하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다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때에 가서야 "갑작스러운 것이었다."는 말로써 자신의 무책임했던 외면을 덮어버리려는 것일 뿐이다.


"카라바조는 그의 작품 속에 어둠과 밝음의 변화를 한 가득 늘어놓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을 감상하다 보면 늘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내게 된다."


세밀하게 살펴보면 물감의 한 입자 곁에 붙어 있는 또 다른 입자마다 변화란 것이 느껴지긴 하지만 조금 떨어져 전체를 놓고 보게 되면 그 변화를 이끌어 내고 있는 임계점이 어디인지, 언제 그것의 명도와 채도가 변한 것인지를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어둠과 밝음은 입자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현상이 아니라 무수한 입자가 함께 어우러져 발현되는 연속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 ***


카라바조의 작품을 감상하는 날이 길어지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눈빛이 깊어지다 보면 알게 된다. 그가 그림 속에 풀어놓은 검정이라는 색은 결코 그냥 ‘검정이라는 이름의 물감’이 아니라 ‘카라바조의 영혼의 색’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미술을 '인간에, 인간을 위한, 인간만의 영적 행위'라고 불러도 좋다는 것을.


카라바조의 영혼의 색인 검은색은 [블랙](Black)이 아니라, 밝음을 묵묵히 떠받치고 있는 [수행원으로서의 블랙](Servant Black)이며, 무대 아래에서 화려한 공연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연출자로서의 블랙](Director Black)이라 할 수 있다.

카라바조의 블랙은 또한 밝음과 대비를 이루어 카라바조가 작품을 통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강하게 전달시키는 [전달자로서의 블랙](Messenger Black]이기도 하다.


카라바조의 블랙에 그의 불가해하고 지난했던 삶을 이입시키면 ‘천재로서 지독한 고독’을 동반자 삼아 살아가야만 했던 현실에서의 무수한 죄악이, 형체가 뭉그러져 검게 박제된 채 그림 속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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