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로마에서의 행적을 통해 본 카라바조의 성향

17. 로마에서의 행적을 통해 본 카라바조의 성향


1.

카라바조는 그 누구보다 예술가로서의 성공을 중요하게 여긴 야망이 큰 화가였다. 카라바조는 그의 성공을 위해서는 강력한 후원자의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것과, 그 뒷받침을 통해서야 비로써 제대로 된 작품을 의뢰받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카라바조는 그의 실력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작품을 의뢰받을 때까지,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거장으로써 대접해 줄 충분한 부와 권력을 가진 강력한 후원자를 만날 때까지, 명성을 쌓으려고 노력하면서 몇 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릴 줄 알았다.


무명의 젊은 화가에게 로마에서의 삶은 결코 호락하지 않았다. 카라바조는 여러 화실들을 전전하면서 빵과 숙소를 위해 그의 재주를 팔아야 했다. 카라바조의 실력이라면 로마의 어느 공방이라도 마다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그가 그린 작품에서 스스로가 만족을 느낄 수 없거나, 너무 낮아진 자존감으로 인해 비천함이 느껴질 때면 스스로 작업장을 떠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럴 때면 스스로를 이렇게 다독였을 것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거야. 그리고 준비하고 기다릴 줄 아는 자만이 그 기회를 알아보는 법이야.”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였지만 마음속에서는 꿈과 야망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기에, 카라바조는 로마에서의 힘든 초창기 시간을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카라바조는, 시련을 겪게 되는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더 이상은 할 것이 없는 걸까." 라거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정녕 여기 까지란 말인가."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에도 무수히 빠졌을 것이다.


그때마다 카라바조의 눈에는 오직 절망만이 자신에게 남겨져 있는 듯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절망이라는 이름의 깊은 계곡에 빠져있을 때도 카라바조는,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한낱 하찮아 보일 수 있는 것들 사이에서, 희망이라는 밝은 빛을 더듬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스스로를 다독였을 것이다.


"원래 희망이란, 좌절에 빠진 이에게는 희망이란 밝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을 알아보는 것에는 생각보다 더 긴 인내가 필요한 법이야."


2.

카라바조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한만큼 야망이 크고 욕심 또한 많은 화가였다. 그런 야망과 자기 확신은 분명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끄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카라바조는 후원자를 찾아 그가 의뢰한 작품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에도, 더 강력한 후원자로부터 새로운 작품을 의뢰받길 원했다.


카라바조가 궁극적으로 기다린 것은, 당시 그가 살아가던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최고 중에 최고이고, 신의 권능을 대행하는 최상위의 기관이면서, 종교와 정치 및 사회의 중심이었던 교황청의 작품 의뢰였다.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간 카라바조는 결국에는 그의 바람대로 교황청으로부터 제단화(altarpiece)를 의뢰받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매장> (The Entombment of Christ(Italian: Deposizione)), 300 cm × 203 cm, 1603–1604 (Created 1602-1603), Pinacoteca Vaticana (Vatican Museum), Vatican City



그림에 있어서 그는 시각적인 전통에 대해 가히 ‘도발적’이라고 할 만큼 강하게 도전하였고, 자신의 눈이 가장 잘 보는 방식으로 사건과 사물, 등장인물을 묘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카라바조의 종교화를 보고 있으면 그 종교적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사건을 직접 목격하고 있거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에 직접 참여하고 있는 형태로 정리하게 된다. 카라바조는 그만의 그런 독특한 방식을 '가장 진실하고 사실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여긴 것 같다.


카라바조의 그림 방식은 로마에서 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인 새로운 예술 양식이었다. 카라바조는 예술에 있어 자신의 능력과,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의 예술이 일으킨 반향(反響)이 얼마나 큰지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인지하였을 것이다.


3.

카라바조의 그림 대부분에서는 특정 종교적 사건에 대한 카라바조만의 독특한 해석과 접근방식, 등장인물과 사물에 대한 그 다운 묘사와 배치를 찾아볼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중에서도 카라바조만의 성향을 살펴볼 수 있는 몇 작품에 대해 살펴보자. 각 작품에 대한 상세한 분석과 해설은 <카라바조 예술의 이해와 작품 해설> 편에서 다룬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생명으로부터 썩어가는 시체를 그림 가운데에 그려 넣음으로써 그림 속 사건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나자로의 부활>(Raising of Lazarus, 380 cm × 275 cm, 1609, the Museo Regionale, Messina)가 있다.

<나자로의 부활>(Raising of Lazarus), 380 cm × 275 cm, 1609, the Museo Regionale, Messina



또한 당대에는 일대 파란을 일으킨 작품인 <성모의 죽음(동정녀의 죽음)>(Death of the Virgin, 369 cm × 245 cm, 1604-1606 (or 1602), Louvre, Paris)은 카라바조의 성향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꼽힌다.

<성모의 죽음(동정녀의 죽음)>(Death of the Virgin), 369 cm × 245 cm, 1604-1606 (or 1602), Louvre, Paris



카라바조의 작품 <성모의 죽음>은 원래 교황의 법률담당관이었던 [라에르치오 체루비니](Laerzio Cherubini)가 로마 [트라스테베레](Trastevere)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의 [카르멜라이트(Carmelite) 성당]에 그의 예배당을 장식하기 위해 의뢰한 것이다. 하지만 그림 속 성모의 모습이, 매춘부 또는 정부를 모델로 한 것 같다는 성당 사제들의 의심으로 인해 인수를 거절당하였고 대신 그 자리에는 카라바조의 가까운 추종자였던 [카를로 사라세니](Carlo Saraceni, 1579-1620)의 그림이 걸렸다.


하지만 이 그림은 카라바조의 작품 중에서 최고 중에 하나라고 극찬한 또 다른 예술가인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추천으로 [만토아](Mantua) 지역의 공작인 [빈센조 곤차가](Vincenzo Gonzaga, 1562-1612)가 구입하였고 [빈센조 곤차가] 공작의 사자(使者)인 [조반니 마그니](Giovanni Magni)가 1607년 4월 1일부터 7일까지 [비아 델 코르소](Via del Corso)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잠시 전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사와 마태>(Saint Matthew and the Angel, Destroyed in 1945 and Reproducted), 295 cm × 195 cm, 1602, kaiser Friedrich Museum, Museum Islan, Berlin



<천사와 성 마태>(Saint Matthew and the Angel, 295 cm × 195 cm, 1602, kaiser Friedrich Museum, Museum Islan, Berlin, Destroyed in 1945 and Reproducted) 또한 카라바조의 그러한 성향을 잘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카라바조가 아직 거장으로서의 명성을 얻기 전에 그린 것이지만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다.

<성 마태와 천사>는 원래 로마의 [산 루이지 데 프란체시 성당] 안의 [콘타렐리 채플]의 제단화로 의뢰받아 완성되었지만, [성 마태]를 일개 무지렁이 중년 남자로 표현한 것과, 천사를 천박하게 표현한 것으로 인해 성당 측으로부터 인수를 거절당해 다른 그림을 새로 그려 대체해야만 했다.


후일 독일의 [카이저 프리드리히 황제 박물관](Kaiser Friedrich Museum, Museum Island, Berlin)에 전시되어 있다가, 안타깝게도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 무렵에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흑백의 사진으로부터 만들어 낸 '컬러 복제품'(enhanced color reproductions) 만으로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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