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란 지극히 이중적인 존재이다. 행동에서만이 아니라 성격 또한 이중적이기에 간혹은 ‘영혼조차도 이중적인 것은 아닐까’라는 의심을 받는 것이 ‘우리’라는 인간인 것이다.
이러한 이중성은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 타인에 의해 쉽게 읽히게 되지만, 어떤 이에게 있어서는 그중에 어느 한 면이 마치 전체의 그인 것처럼 보이게 되어 편견 내지는 오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 하나는 밤하늘의 달이라고 할 수 있다.
달은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오직 밝은 면만을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달은 인간에게 자신의 어두운 면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따라서 달의 재배를 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이, 자신의 한쪽 면만을 보여주려는 것은, 비록 그것이 자신에 대한 편견으로 이어진다 해도, 본능과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달의 한쪽 면이 그렇듯이 ‘숨겨진 면’ 또는 ‘가려진 면’이라 불리는 어두운 면은 부정적이거나 일상적이지 않은 것에게 연결되곤 한다. 따라서 어두운 면의 지배 속에 있는 시간이 증가할수록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지고 그에 따라 비이성적이고 부정적이면서 통제할 수 없는 육체적 행위가 비주기적으로 반복해서 발현하는 것이다.
천재적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예술가들의 경우에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하다고 할 수 있는데, 카라바조 또한 그런 부류의 예술가 중에 한 사람이다.
카라바조는 빛과 어둠을 혁신적이고 완벽하게 다룬 명암법(키아루스쿠로, chiaroscuro)의 대가이다. 카라바조는 ‘빛의 화가’이면서 동시에 ‘어둠의 화가’인 것이다.
이상적이고 성스럽게 그려야만 하는 종교적인 그림조차, 의뢰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분명 알고 있었지만, 전통적인 기법을 과감하게 벗어나 로마의 저잣거리 어디에서나 만나게 될 것 같은 인물과 일상의 소재를 이용해서 사실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표현한 화가가 카라바조이다.
예술사에서의 카라바조는 가마득할 만큼 높은 산이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고, 계곡이 깊을수록 어둠이 짙을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빛에게는 어둠이라는 동반자가 늘 곁을 함께 하고 있다. 어둠이 저곳에 있기에 이곳의 빛이 더 밝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카라바조에게 드리웠던 어둠은 그의 천재성을 더욱 빛나게 하는 도구였을 수도 있다.
카라바조의 삶은 이중성 그 자체였다. 그에게는 그가 있게 한 천재성만큼이나 통제할 수 없는 난폭성이 함께 했다. 로마 최고의 화가로써 부와 명성을 거머쥔 후에도 카라바조는, 거리에 나서는 날이 잦았고 크고 작은 분쟁에 쉽게 휘말리곤 했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뒷골목의 술집에서 더럽혀지기 일쑤였다.
허리에 큰 칼을 찬 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카라바조를 그의 추종자들이 따르고 있는 모양새는, 언제든 싸움질을 벌릴 준비가 되어있는 여느 불량배의 행색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이름값도 못한다.", "저 정신 나간 놈이 그 유명한 카라바조라고?", "정말 재능이 아깝다 아까워.", "도대체 하나님은 왜 저따위 놈에게 그런 재능을 주셨을까?"라는 손가락질을 당했지만 그는 이중적인 삶을 멈추지 못했다.
카라바조의 이중성은 로마 신화에 나오는 마르스(Mars, 그리스 신화의 아레스(Ares))와 미네르바(Minerva, 그리스 신화의 아네타(Athena))에 비유할 수 있다. 로마 신화에서 마르스는 무력과 힘을 상징하는 군신이고 미네르바는 지혜와 기술을 주관하는 신이다.
<Statue of Ares> from Hadrian's Villa (하드리안 저택에서 나온 아레스 상)
마르스와 미네르바는 신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인간의 이중성을 마르스와 미네르바에 비유할 수는 없다. 오직 신이라고 불릴 만큼 경이로운 재능을 지닌 인간만이 신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카라바조가 마르스와 미네르마에 비유되는 것은 그의 폭력적인 면조차도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완전히 가리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카라바조를 미네르바에 비유하는 것은 화가로서의 그의 재능이 "신의 경지에 이른 것은 아닐까?"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이나 대단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작품성에 있어서는 혁신적이면서도 창의적이라서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화가들로부터 '리더로서의 카라바조'로 추앙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카라바조를 마르스적이라고 비유하는 것은 분명 그의 난폭성과 연관되어 있다. 하지만 단지 난폭하기에 마르스적이라고 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마르스는 전쟁의 신이다. 전쟁에서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뒷골목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더욱이 그 폭력이 한 개인의 불안정한 성격에 기인한 것이라면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카라바조가 저지른 크고 작은 사건들은 그의 개인적인 트라우마에 기인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를 결코 마르스에 비유할 수는 없다. 단지 난폭하기에 마르스적이라는 것은 군신 마르스를 비하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카라바조를 마르스에 비유하는 것은 그의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미네르바적이라 할 만큼 천재적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해서, 충분히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기도 하다.
1600년부터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로마를 떠나야만 했던 1606년까지, 전성기였던 그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여러 차례의 수사기록과 법정기록을 남긴 카라바조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공식적인 자료가 그 정도로 남아 있다면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분쟁에 연루되었단 말인가.
경찰서와 법정, 감옥을 들락거리는 동안 한편으로는 수많은 종교화를 그려낸 미네르바적인 그를 후세의 우리는 어떤 시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가 '빛과 어둠의 화가'가 된 것이 단지 그의 이중성 때문이라 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종교적인 엄숙함과 성스러움은 도대체 어디에서 발원하고 있는 것일까.
전쟁의 잔혹함 앞에서는 ‘대체 왜’, ‘무엇 때문에’라는 정답 없는 질문에 빠지게 되듯이 카라바조의 작품 앞에서는 주어질 답보다 훨씬 더 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그 지속성과 일관성으로 본다면 카라바조의 행위를 한낱 스캔들로만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의 재능이 ‘천재에게 주어진 형벌’이라서, 굴러 내려올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돌을 굴려 산 정상으로 올려야만 하는 시지프스에게 가해진 끝없는 형벌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세속에서의 일개 범죄자가, 그것도 종국에는 살인까지 저지른 흉악범이 예술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은, 아직도 수많은 추종자가 그를 따르고 있는 것은, 그에 대해 수많은 연구가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미네르바 적인 천재에 있어서는 일반적인 평가의 잣대 따위는 무의미할 수 있다."는 의미인 걸까. 그렇다면 그에게 들이댈 수 있는 잣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의 행적을 쫓으면 쫓을수록, 어딘가에는 답이 있을 것 같지만 결코 찾아지지도 않을 것 같은, 망망함에 빠져들게 된다.
“카라바조에게 있어 그의 화실은 그만의 성전이고 그의 그림은 그 재단 아래에 무릎 꿇은 그만의 간절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뒷골목 어딘가에서 뭔가 기행을 저질렀을 것 같은 카라바조가 화실로 돌아와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성전에 촛불을 밝히듯 붓을 들고 정성스레 물감을 이긴다. 그의 앞에 놓인 캔버스에 성화가 차오른다. 그의 얼굴에는 구원의 환희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