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9년의 늦은 여름 무렵에 채 1년이 안 되는 기간(약 9개월) 동안 머물렀던 이탈리아 남부의 섬 시칠리아를 떠나 나폴리로 돌아왔다. 카라바조의 이 여정에 대해 “돌아왔다.”라는 귀환의 의미가 담긴 것은, 약 3년 전인 1606년, 자신에게 내려진 사형선고의 집행을 피하기 위해 처음으로 도피한 곳이 이곳 나폴리였기 때문이다. 나폴리는 카라바조의 도피생활이 시작된 곳이면서 또한 끝난 곳이기에 카라바조에게 나폴리는 특별한 곳이다.
카라바조는 시칠리아에 머무는 동안 ‘적'(enemy)에게 쫓기고 있었고, 당시 교황이었던 [바오로 5세]로부터 특별사면을 받아 로마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콜론나 가문의 보호를 받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시칠리아에서 '카라바조를 쫓았다는 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에 따라 몇 가지 추측을 내놓고 있다.
카라바조에 대한 기록 대부분이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도 반론의 여지가 있다. 시칠리아가 아무리 커다고 한들 본토와 떨어져 있는 하나의 섬에 불구하고, 카라바조는 가는 곳마다 화가로서만이 아니라 기행을 저지르는 인물로도 유명하였으며, 계속해서 작품의 의뢰를 받아 그림을 그리는 공인과도 같은 신분이었기에, 그의 모든 동선은 사실상 공개된 것이나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만약 카라바조의 적이 그의 뒤를 쫓았다면 결코 어렵지 않게 체포 내지는 피습할 수 있었겠지만, 시칠리아에서는 그런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시칠리아에서는 '적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다'라기보다는 '적의 추적이 있을 것을 대비해 옮겨 다녔다'라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나폴리로 옮겨온 후에, 성 요한 기사단의 피습으로 부상을 당하였기에, ‘카라바조를 불안에 떨게 한 적’이란 게 전혀 실체가 없었다고는 할 수도 없다.
기록이란 것이, 그것도 몇 백 년 전의 기록이란 것이, 객관적인 것만이 남겨진다기보다는, 부풀려진 입소문과 오기가 포함된 다른 기록을 바탕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이의 의도가 그 안에 심기기 마련이란 점을 카라바조의 기록에 있어서도 감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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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 or John in the Wilderness), 159 cm × 124 cm, 1610, Galleria Borghese, Rome
돌아온 나폴리에서 그린 작품으로는 <성 베드로의 부인>(The Denial of Saint Peter, 94 cm × 125.4 cm, 1610,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City)과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 or John in the Wilderness, 159 cm × 124 cm, 1610, Galleria Borghese, Rome), 그리고 그의 마지막 그림인 <성녀 우르술라의 순교>(The Martyrdom of Saint Ursula, 140.5 cm × 170.5 cm, 1610, Palazzo Zevallos Stigliano, Naples) 등이 있다.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은 8개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것들 중에 로마의 [보르게세 갤러리](Galleria Borghese)가 소장하고 있는 1610년 작 <세례자 요한>이, 이 시기의 나폴리에서 그린 작품이다. 또한 <성녀 우르술라의 순교>는 카라바조가 그린 마지막 작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성녀 우르술라의 순교>에서는 훈족의 왕이 쏜 화살이 [성녀 우르술라]의 가슴을 강타하는 극적인 순간을 카라바조의 자유로운 붓놀림으로 포착함으로써 [성녀 우슬라]의 이야기를 더욱 인상적으로 만들고 있다.
<성녀 우르술라의 순교>(The Martyrdom of Saint Ursula, 140.5 cm × 170.5 cm, 1610, Palazzo Zevallos Stigliano, Naples)
이 시기 카라바조의 작품은 화풍 면에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진화’라고 표현할 만큼, 계속적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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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 10월에 목숨을 노리는 격렬한 공격을 받아 얼굴에 심각한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때 입은 부상으로 인해 카라바조가 죽었다는 소문이 로마까지 전해졌다.
이 사건에 대해서 "카라바조가 몰타에서 부상을 입힌 기사의 사주를 받았거나, 그의 명령을 받는 또 다른 파벌이 매복하고 있다가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 또한 '기록하는 자의 의도에 의한 것'이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일종의 '오기(誤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받쳐 든 살로메> (Salome with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116 cm × 140 cm, 1609, Palacio Real de Madrid(Royal Palace of Madrid), Madrid
카라바조는 이 사건이 발생한 직후 <세례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받쳐 든 살로메>(Salome with the Head of John the Baptist, 116 cm × 140 cm, 1609, Palacio Real de Madrid, Madrid)를 그려서 성 요한 기사단의 총책임자이며 카라바조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했던 알로프 드 비냐쿠르에서 바쳤다. 이 그림에서 목이 잘린 세례 요한의 얼굴로 카라바조 바로 자신을 그려 넣었다. 이것은 자신의 목을 알로프 드 비냐쿠르에게 바침으로써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해 달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카라바조를 공격한 것에는 '몰타에서 카라바조가 부상을 입힌 기사'가 아니라 성 요한 기사단이 직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고 볼 수 있고, 카라바조를 피습하여 부상을 입힌 것도 성 요한 기사단 소속의 기사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 피습으로 인한 싸움이 비록 격렬했다고는 하지만 카라바조는 부상을 입었을 뿐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라바조는 '적으로부터 쫓기고 있다'라고 여겼던 시칠리아에서가 아니라 '가장 안전하다'라고 믿었던 나폴리에서 피습을 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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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에 카라바조는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25 cm × 101 cm, 1610, Galleria Borghese, Rome)을 그리면서도 '목이 잘린 골리앗'의 얼굴로 자신을 그렸는데, 거인 골리앗의 머리를 자른 어린 다윗이 '승리자로서의 표정'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목이 잘린 골리앗을 이상하리만치 측은한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이 당시 카라바조는 자신을 '예술에서는 골리앗과 같은 거인'이지만 삶에서는 '언제든지 목이 잘릴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David with the Head of Goliath), 125 cm × 101 cm, 1610, Galleria Borghese, Rome
1610년에 그려진 이 그림은 교황의 조카이자 예술 애호자로서 카라바조의 사면을 중재해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진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Cardinal Scipione Borghese)에게 바쳐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카라바조는 이 그림에서 자신은 이제 ‘목이 잘려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골리앗이나 다름없는 신세’라서 ‘위대한 다윗조차 그런 자신의 신세를 측은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간절하게 호소함으로써 '작품의 대가'로 사면을 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 덕분인지 로마의 후원자들로부터 전해진 ‘곧 임박한 사면’ 소식은 카라바조를 고무시켰고, 1610년 여름에 그의 사면을 돕고 있는 스키피오네 추기경을 위해 준비한 그림들과 함께 로마를 향해 배에 올랐다.
로마로 향하는 카라바조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밀라노에서 카라바조로, 그리고 다시 밀라노로, 밀라노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나폴리로, 나폴리에서 몰타로, 몰타에서 시칠리아로, 시칠리아에서 다시 나폴리로, 그동안 많은 길을 거쳐왔지만 로마로 돌아가는 이 길이 인생의 마지막 길이 되리라는 것을 카라바조는 결코 몰랐을 것이다.
카라바조는 로마에 도착하지 못했고 그 길 위에서 허무하리만치 한 순간에 세상을 떠났다. 나폴리를 떠난 후 카라바조의 사망까지 일어난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조차 혼란하여 온갖 추측이 난무하고 있는데, 그것들은 카라바조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미스터리를 키우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 붙은 온갖 추측과 미스터리는 카라바조를 ‘죽음조차도 카라바조다운 천재 괴짜 화가’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