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피생활이 시작된 이후로는 늘 그래 왔지만 나폴리에 돌아온 카라바조는 더욱더 ‘사면’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사면을 위해 선택했던 몰타였지만 '거의 성공 단계'에서 망쳤기 때문이다. 원인은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만 아직 희망의 끈을 놓기에는 너무 이르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무언가에 집중할 것이고 그 노력만큼 희망의 불꽃이 반짝일 것이라고 믿기에.
카라바조는 도피생활 중에도 계속해서 작품을 의뢰받아 그림을 그렸고, 화풍은 계속적으로 진화하였다. 카라바조는 알고 있었다. 오직 그림만이 그에게 자유를 줄 것이고, 오직 그림만이 그의 희망의 불꽃이며, 오직 그림만이 그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이자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것을.
카라바조는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현지의 조력자를 위해서 그렸고, 작품을 의뢰한 교회를 위해서 그렸고, 그를 로마로 돌아가게 해 줄 귀족과 성직자를 위해서 그리고 또 그렸다.
로마를 향한 갈망은 사면이 임박했다는 소식만으로도 가슴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어느 사이 카라바조의 몸은 배에 실려 있었다. [영원의 도시] 로마는 그의 [영혼의 도시]였기에 로마로 가는 길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향길이었다. 바람과는 달리 카라바조는 로마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의 인생을 따라다니던 ‘죽음의 트라우마’가 이 길에서는 현실의 현상으로 발현되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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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가 사망한 날짜에 대해서는 누구도 정확하게 말할 수 없다. 카라바조의 친구 중에 시인(poet)이라고 알려진 한 친구는 카라바조가 사망한 것이 1610년 7월 18일의 일이었다고 말하였는데 그것조차 카라바조가 사망하고 나서 시간이 지난 후에나 밝힌 것이고, 근거가 무엇인지 또한 알 수 없어 진위를 판별하기는 어렵다.
카라바조의 죽음에 대한 가장 믿을만한 기록은 1610년 7월 28일 로마에서 [우르비노 공국(公國) 궁정](ducal court of Urbino)으로 가는 익명의 [아비소](avviso, 개인 뉴스레터(private newsletter))가 카라바조의 사망 소식을 최초로 보도했다는 것이다.
사흘 후 또 다른 아비소가 "카라바조가 나폴리에서 로마로 가던 중 열병으로 사망했다."라고 보도한 것으로 보아 당시 여러 아비소들이 카라바조의 사망 소식을 다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여러 소식지가 카라바조의 사망 소식을 보도할 정도로 그는 악동이자 거장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최근에 와서 토스카나(Tuscany) 주 [그로세토](Grosseto) 지방의 한 작은 타운인 [포르투 에르콜레](Porto Ercole)에서 "카라바조가 열병(fever)으로 인해 사망했다."는 사망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카라바조를 쫓던 연구자들의 걸음은 이 한적한 바닷가 마을에 멈춰 서게 되었다.
"카라바조는 왜 이 작은 마을에서 삶을 마쳐야 했을까."
"카라바조의 죽음에는 대체 어떤 일들이 엉켜 있는 것일까."
카라바조의 죽음은 카라바조라는 천재 화가를 되돌아보게 하는 또 다른 오브제가 되고 있다.
<카라바조의 여정 지도>(Map of Caravaggio's Travels)는 카라바조의 전 생애에 걸친 행적을 한 장의 지도 위에 표기한 것으로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것에 있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카라바조의 여정 지도>(Map of Caravaggio's Travels) (자료 출처: Wikipedia, CC BY-4.0, free to Share — copy and redistribute the material in any medium or form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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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사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버전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에 잘 알려져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폴리에서 올라 탄 배가 [팔로 라지알레](Palo Laziale) 항구에 정박했을 때 카라바조가 하선했고, 그곳에서 스페인 군대의 경비대장이 카라바조를 다른 사건의 범죄자로 오인하여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보석금을 지불한 끝에 가까스로 이틀 만에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때는 이미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에게 바치기 위해 그렸던 그림들과 함께 그의 물건들은 배에 실린 채 그대로 항구를 떠나버린 뒤였다.
그림만이 자신의 정체성이고 그림이 있어야만 사면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카라바조는 배의 다음 정착지를 향해 육로를 따라 황급히 이동한다. 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 포르투 에르콜레에 도착하였지만 배를 찾을 수 없었다.
이에 희망을 잃는 카라바조는, 도와주는 이 없이, 막연히 해변의 모래 위를 돌아다니며 열병(이 열병에 대해서는 말라리아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과 이질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 감염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에 시달리다가 1610년의 어느 여름날에 외롭게 죽음을 맞는다.
이 버전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갖게 된다.
지도를 보면 팔로 라지알레는 로마의 근교이다. 로마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가져온 모든 짐과 함께 하선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어떤 영문인지 자신의 짐을 배에 그냥 남겨둔 채로, 그것도 자신의 그림들을 배에 그냥 두고서는, 몸만 배에서 내렸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상황이 그 과정에 발생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대해 카라바조가 팔로 라지알레에서 다른 배로 갈아타기 위해 하선하였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 말은 카라바조 행적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이들이 꾸며낸 소설 같은 얘기일 뿐이다.
또 다른 버전에서는 카라바조가 당시 항구의 부랑자에 의해 살해를 당하였다는 것이다. 카라바조의 평소 행실을 생각해보면, 항구의 부랑자와 어떤 형태로든 실랑이가 있었고 그것과 연관된 사건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또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게 된다.
결투 끝에 토마소니를 살해한 로마에서의 사건이나, 기사에게 부상을 입힌 몰타의 사건 이외에도 카라바조가 저지른 폭행과 관련된 여러 사건들과, 기사들의 피습을 이겨낸 나폴리에서의 일을 보게 되면, 싸움이라면 나름 일가견을 가졌을 카라바조가 일개 부랑자에게 살해를 당했다는 이야기에는 동의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카라바조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포르투 에르꼴레는 아주 작은 타운이다. 항구라고 해봐야 크지 않은 배 몇 척이 겨우 드나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작은 마을에는 떠돌이 부랑자들이 모여들지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랑자들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으로 찾아들기 마련이다. 그래야만 먹을 것과 몸을 누일만한 곳을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가정을 해볼 수는 있겠다. 만약 포르투 에르콜레에 도착한 카라바조가 긴 여정으로 인해 이미 너무 지쳐 있었고, 당시가 월 한 여름이었기에, 오는 길에 열병에도 걸려 몸조차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항구에서 잡일을 하며 지내는 마을의 거친 사내들과 싸움을 벌렸고 그로 인해 사망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 버전 또한 ‘카라바조의 죽음’을 해석하는 하나의 흥미로운 버전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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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그나마 가장 확실한 기록은 카라바조는 사망 당시 열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열의 원인과 그 열이 카라바조가 사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카라바조가 어떻게, 무엇으로 인해 죽었는가?”
이 문제는 카라바조가 사망한 당대에서는 떠들썩한 논란과 루머를 낳았던 문제였고, 시간이 흘러 그가 역사의 한 흐름이 된 이후부터는 다양한 ‘역사적인 논쟁’과 ‘연구’를 낳고 있는 문제이다.
카라바조의 죽음에 관해 당대에 퍼진 가장 일반적인 루머는 토마소니 가문이나 성 요한 기사단의 복수가 카라바조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오랫동안 전통적인 관점에서의 역사가들은, 당시에는 남자들의 사망 원인으로 매독이 흔하였기에, 카라바조의 죽음 또한 매독이 원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였고, 카라바조가 말라리아에 걸렸거나 살균되지 않은 유제품으로 인해 브루셀라병(brucellosis)에 걸렸을 가능성을 제시한 학자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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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유해는 그가 사망한 [포르투 에르콜레](Porto Ercole)의 [산 세바스티아노 공동묘지](San Sebastiano cemetery, 1956년에 문을 닫는다.)에 묻혔다가 이후 [세인트 에라스무스 공동묘지](St. Erasmus cemetery)로 옮겨졌다.
2010년에 카라바조를 연구하는 고고학자들이 세인트 에라스무스 공동묘지에 있는 3개의 지하실에서 발견한 유골들에 대해 약 1년에 걸쳐 DNA 분석과 탄소 연대 측정,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방법들을 동원하여 면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그중에서 카라바조의 유골을 특정해 내었다고 발표했다.
이들의 초기 결과에서는 카라바조의 죽음이 납중독(lead poisoning)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카라바조가 활동하던 당시에 사용된 물감이 많은 양의 납염(lead salts)을 함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카라바조의 폭력에 대한 탐닉 또한 납중독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증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후의 연구에서 카라바조가 나폴리에서 입은 부상이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결국 황색포도상구균(Staphylococcus aureus)에 감염되어 패혈증(sepsis)으로 인해 사망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들이 내린 결론이 맞다면, 카라바조가 사망하게 된 원인은 나폴리에서 그를 급습해서 큰 부상을 입힌 성 요한 기사단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그렇다면 사면을 위해 찾아갔던 성 요한 기사단의 몰타섬이 카라바조에겐 죽음의 섬이었던 것이다.
2002년에 공개된 교황청의 문서에서는 카라바조의 죽음은 부유한 집안인 토마소니 가문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카라바조가 1606년 그의 모델이었던 [필리드 멜란드로니](Fillide Melandroni)와의 애정문제로 갱스터(gangster)인 라누치오 토마소니(Ranuccio Tommasoni)와 결투를 벌렸고 불미스러운 행위 끝에 라누치오 토마소니를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로 그의 가문이 1610년 여름 포르투 에르콜레에서 카라바조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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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병으로 인한 것이건 싸움으로 인한 것이건, 복수 때문이건, 그 원인이 무엇이었건 간에 카라바조는 로마로 돌아가던 길에 세상을 떠났다. 카라바조의 죽음에 좀 더 극적인 효과를 주고 싶은 사람들은 “카라바조가 죽기 바로 직전에 교황 바오로 5세가 카라바조의 후원자와 교황의 조카인 스키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의 요청을 못 이겨 사면장에 사인을 했다.”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카라바조가 죽을 때 그의 손에 교황의 사면장이 쥐어져 있었다.”라고도 한다. 진위를 떠나 두 얘기 모두 카라바조의 죽음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있다.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법이다. 범죄자이자 거장인 카라바조는 그의 작품 <다윗과 골리앗>에서 승리자 다윗과 패배자 골리앗처럼 ‘예술가로서는 승리자이지만 인생에서는 패배자’로 살아가다가 세상을 떠났다. 변하지 않는 진실은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카라바조 그 자신이라는 것이다.
카라바조를 쫓는 이의 가슴속에는 저마다의 카라바조가 똬리를 틀고 있다. 그들은 저마다의 눈으로 카라바조의 작품과 삶과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카라바조는 자신의 죽음조차 각자가 스스로의 눈으로 그려보라고 하고 있다. 카라바조라는 화가는 한 사람이었지만 무수히 많은 카라바조가 존재하게 된 현상을 [카라바조 효과]라고 불러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