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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카뮈 그리고 부조리의 단상

파리와 카뮈 그리고 부조리의 단상



1.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별 다른 이유가 없는데도 다른 날과는 달리 다리며 몸이 무겁게 느껴지는, 그런 괜한 날이 가끔 있다. 오늘도 그런 날인 것 같다. 해거름 해질 무렵 돌아온 숙소에서 한참을 뒤척거리다가 보니 창밖에 내린 어둠이 촛대처럼 솟아있는 가로등에 하나 둘 불을 지펴 넣고 있다. 창가를 떠나지 못한다. 어슴프레 불을 밝힌 기둥 몇 개만으로도 파리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길 건너 저 편 건물의 불 켜진 창에 쳐져있는 커튼에서 한 남자의 실루엣이 어른거린다. 마리오네트의 그림자 같은 무채색의 움직임이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듯 낯설지 않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손에 움켜쥐고 그의 공연을 응시한다.


또각또각 시곗바늘이 몇 바퀴 돌아가고 무대의 불이 꺼진다. 방문이 닫히는 여음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나무로 만든 계단을 내려서고 있는 구두 바닥의 파형 넓은 소리가 저벅저벅 저녁 공기를 길게 가로지른다.

이윽고 건물의 현관 앞에 선 남자는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 든 조막만 한 네모난 종이상자에서 짧고 가는 막대기 한 개비를 뽑아 입에 문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우뚱 기울여 마치 성스러운 의식인 듯 공손하게 불을 붙인다. 밤안개 같은 담배연기가 어둠 속으로 번져간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얼굴의 윤곽이 일식에서 갓 깨어나려는 달빛의 은밀한 반항 같다.


알베르 카뮈 Albert Camus, 그가 파리의 밤거리에 걸음을 딛는다.



2.

스무 살의 삶을 파릇하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그때에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 캠퍼스에 적을 둔 첫 번째 해를 보내고 있던 나의 책 읽기 행보는 철없는 한 마리 새의 방향 없는 비행처럼 이 책의 표지에서부터 저 책의 인쇄정보까지, 알파의 머리 끝에서부터 오메가의 발바닥까지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날아다녔다.


제약할 것이라곤 어느 것 하나 없었던 그 시간은 마치 모서리 없는 우주의 공간처럼 무한히 주어질 듯했다. 굳이 부족한 것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구할 수 있는 책들이, 개인적인 형편과 시대적인 여건상, 그리 다양하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도서관이나 헌책방을 뒤져서 구할 수 있는 책의 폭넓지 않은 다양성을, 편향된 나의 글 읽기 습성에 대한 변명으로 삼을 수는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선책이 없다면 차선책을 찾아가는 것은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어차피 읽은 책의 양이란 건, 시간의 울타리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기에 찾아낼 수 없는 책에 대한 미련 같은 건 손에 쥔 책의 어느 페이지인가에 슬쩍 묻히고 은근슬쩍 덮어버리면 될 뿐이었다.



3.

이 책 저 책, 검은 잉크를 꾹꾹 눌러 박은 활자에 정신 줄 놓고 지내는 사이에 파장이 길어진 하늘빛이 나무 둥치며 잎사귀에서 물기를 빼내고 있었다. 해야 할 무언가를 찾아다니거나, 하고 싶은 무언가에 매달리다 보면 몇 달이란 시간은 변덕스러운 계절의 한 자락처럼 수이 지나가기 마련이다.


캠퍼스의 여기저기에서, 등빨 좋은 나무의 가지 끝에서 초록빛을 말려내던 나뭇잎은 조각조각 잘라낸 색종이를 이어 붙이듯 붉고 노란빛을 캠퍼스에 조사하였고, 대학생이란 이름으로 신분을 세탁한 날부터 시작된 순례 길은 스물, 만 열여덟의 가을에 이르러서 낙엽의 향기보다 더 향기 짙은 책의 숲 속 길을 깊이깊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체 난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으며, 실존하고 있는 존재일까. 실존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실존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의 실체는 어떤 것일까.”


존재에 대한 질문이란 것이 인간의 삶에 던져진 영원한 난제임을 깨닫는 것은, 아직 씨알조차 제대로 굵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에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사실 그것을 난제라고 인정하는 순간, 비록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체념의 발로 때문이고 젊은 날의 체념이란 것이 너무 이른 실패자로 비칠 수 있다 해도, 꼭 어딘가 답이 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살짝이나마 옆으로 밀어둘 수 있게 되었으니, 몸이며 마음이 조금이나마 더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다만 그 언저리라도 기웃거리다가 보면 혹시 나의 존재에 대해 한 발짝쯤이라도 더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비록 머리는 무거웠지만, 먼 기약만을 담아두게 되었다.



4.

파리에 오면 꼭 만나고 싶은, 꼭 만나야 할 한 사람이 있다. 그 시절, 아직 길지 않았던 나의 인생 호수에 그의 작품 하나가 일으킨 일렁임은 아직도 낮 빛을 현란하게 반사시키고 있다. 시지프스 또는 시지프, 시시포스란 이름으로 불리는 그 또는 그 개체에게 가해진 원죄적 형벌을 다룬 이야기는 그 시절의 나에게 큰바람이 휘몰아가는 것만 같은 파고 높은 물의 일렁임이었다.

번역 상 불리게 된 그것의 공식적인 명칭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나의 서재에 자리 잡고 있는 책의 표지엔 <<시지프스의 신화>>란 글자가 커다랗게 박혀있으니, 그냥 시지프스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사실 시지프스의 신화는 ‘하늘이 뚫려버린 공간’에서 ‘흐름조차 알 수 없는 시간’ 동안 가해지는 끔찍한 형벌에 대한 내용이다. 그 이야기의 본질이야 어쨌든 간에 신은 자신이 지닌 거대한 능력과는 대조적으로 소갈머리는 좁디좁아서 잘 삐치는 데다가, 일단 한 번 삐치게 되면 신의 능력만이 고안해낼 수 있는 가혹한 형벌을 취미 삼아 저지르고, 피 형벌자의 고통 따윈 안중에도 없이 무지막지하기 그지없는, 그래서 어찌 보면 양아치처럼 보일 수도 있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어쨌든 첫 번째 읽기를 끝내고 책장을 덮던 어느 날의 나에게 시지프스의 신화는 세상이라는 하데스를 살아가야만 하는 나의 이야기가 되었고 나는 곧 시지프스가 되었다.



5.

파르르 떨리던 눈가의 진동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세상은 자신의 광폭한 힘을 자랑질하고 싶은 철부지 신의 놀이터이고 그 세상을 살아가야만 하는 현실의 나는 무한히 반복되는 잔인한 형벌의 쳇바퀴에 갇혀버린 너무 일찍 철든 연약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자비로운 신은 오래전 인간을 떠나버렸다. 어쩌면 그 또는 그녀는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세상이란, 어떠한 반항도 허용하지 않는 잔인한 폭군이 다스리는 공간일 뿐이고 나의 등을 누르는 등짐은 어떻게든 그 무게를 짊어져야만 하는 내가 미처 인지하지 못한 ‘원죄’에 대한 지독한 형벌이었다.


망막 깊은 곳까지 허망함이 서려 있을 시지프스의 눈을 생각했다. 그냥 흘긴 것 같은 누군가들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시지프스가 묵묵하게 그 산길을 오르고 내렸다고 하는데, 그것은 진지한 사색 없는 한낱 상상이 만들어 낸 책임 없는 궤변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그 잡스런 평론은 주어진 형벌을 그냥 받아들이라는, 현실에게 이미 세뇌당한 채로 살아가는 얼치기 지식인의 허망한 뽐내기일 뿐이다.


형벌의 주문이 수형자의 머리조차 텅 비우도록 하란 것이었던가. 시지프스가 지은 죄라는 게 의도된 것이었거나 의도되지 않은 것이었거나 간에, 누구나 지을 수 있는 단순한 실수이거나, 한 번쯤은 있을 수도 있는 가벼운 반항에 속하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설혹 그것을 죄라고 단정 짓는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죄이기에 어찌 정해진 수형기간조차 없는 영원한 형벌에 처해졌단 말인가. 실수 없고 반항하지 않는 삶이란 없을진대, 그렇다면 언젠가 나 또한 시지프스와 같은 운명을 빈 머리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인가.



6.

돌은 다시 명계의 산을 굴러서 내려가고 굴러서 올라온다. 나 또한 다시 그 돌을 따라 걸어서 내려가고 걸어서 오른다. 셀 수 없을 만큼 오르내렸을 이 길을, 길가의 잔풀을 시지프스는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이 이야기의 잔혹함은 그의 기억으로 인해 무한하게 증폭된다. 헤어날 수 없이 반복되는 형벌에는 오직 망각의 은총만이 마음과 눈빛을 고르게 해 줄 수 있을 뿐이다. 목마른 시지프스와 망각의 강, 레테에 들러 강물 한 잔을 나누어야겠다.


거친 산길을 따르던 그 시절의 생각은 다시 좁은 길로 이어진다. 레테의 물을 마셨으니 어디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산 아래의 저곳으로 내려가고 다시 올라와야만 한다는 것은 어렴풋이나마 기억에 남아있다. 어느 길로 가게 될지,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모른다. 어쩌면 산이 여기에 있기에 내려가야 하고 올라가야만 하는 것일 수 있다. 내가 오갈 수 있는 길은 좁고 거칠지만 익숙한 이 산길뿐이다.


‘아는 만큼 자유롭다’라는 표현은, ‘지식의 공간 안에서라면 자기변명의 최면에 스스로가 빠져들기 좋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물음은 카뮈의 또 다른 작품 ‘이방인’과 ‘칼리굴라’, ‘페스트’, ‘정의의 사람들’을 찾아 읽어 내려갔다. 어차피 할만한 것이라곤 책을 읽는 것 밖에 없던 시절이니 손에 잡힌 것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래야 삶에 대해 뭔가 조금 더 알게 될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7.

결과란 것은 항상 원인에 뒤따르는 현상의 일종이다. 하지만 삶이란 ‘이것이다’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거나, ‘이러하다’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인이라 얘기되는 것의 실체는 희미하기 일쑤이고, 그래서 때로는 그 안에 갇혀버리는 형상이 되기도 한다. 스물의 나에게 주어졌던 환경은, 시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늘 카뮈가 말한 부조리에 갇힐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굳게 잠겨버린 울타리 안의 인간은 어떤 것들을 발현할 수 있을까. 갇힌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반항’뿐인 것일까. 카뮈의 전기 작품들이 ‘부조리’를 주제로 다룬 반면에 후기 작품들의 주제는 ‘반항’인 것은 아마 그런 연유에서 일 수도 있다.


‘영원한 반항아 카뮈’와 함께 바람 부는 하늘을 몇 번 휘돌던 생각은 시지프스의 신화로 돌아간다. 왜 시지프스는 더 이상 반항하지 않았을까. 더한 형벌이 내려질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체념한 것이었을까. 그리 쉽게 체념할 것이었다면, 물론 절대 쉽지는 않았겠지만, 그는 왜 처음부터 신의 명령을 어긴 것일까.

앞뒤가 어긋나 보이는 이 부조리한 상황은 절대적 존재의 권능에 따르라는 기성 지식인 누군가의 의도된 해석인 것일까.



8.

카뮈를 떠난 책 읽기의 여정은 망망한 대해를 파도와 바람과 구름을 따라 떠돌았다. 동시대를 살아간 프랑스의 몇몇 작가를 거쳐 이차대전 전후의 문학 전반을 뒤지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하인리히 뵐의 <<어떤 어릿광대의 견해>>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 이르렀다.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그것은 당연한 책 읽기의 수순이었다.


그것들이 전후 문학이라 불리든지 폐허 문학이라 불리든지 간에, 이차 세계대전이 할퀴고 지나간 폐허라는 특수성이 빚어낸 부조리한 상황은, 사색하는 자들에게 인간의 실존에 대한 질문만을 더하였고 그 답을 찾는 여정은 당시의 그들과 후일의 오늘에 그들을 뒤따르는 이들에겐, 이미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진행형으로 전개되어 있을 뿐이다.

그렇게 어찌어찌 살아가다 보니 어느덧

그 먼 길을 헤치고 걸어서 여기까지 와있다. 하지만 답에 조금 더 다가섰다기보다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것은 부조리한 상황이란 게 어떤 시대적 특수성에서 잉태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기 때문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속한 현실의 상황이란 게, 카뮈가 살아가던 전후의 피폐함과 별반 다를 바가 없고, 나 자신의 영혼조차 삶이라는 치열한 전투를 치른 전흔으로 잔뜩 얼룩져 있으니 나의 실존에 대한 답 찾기는 더욱 가마득해져 가는 것도 같다.


답 없는 답 찾기, 멀어져 가는 답 쫓기, 이런 것들조차 형벌이라면 나의 답 찾기는 또 다른 부조리한 상황에 빠진다. 그 시절의 질문은 계속된다.


“난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며, 실존하는 존재일까, 인간의 실체는 무엇일까.”


밤 그림자를 길게 끌며 그가 파리의 가로등 아래를 걸어간다. 그의 검은 그림자가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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