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그거 아는가. 내 심장은 항상 지베르니(Giverny)에 머물고 있다는 걸.”
이 말은 클로드 모네(Claude Oscar Monet, 1840년 11월 14일- 1926년 12월 5일)가 누군가에게 남겼다는 말에 향기를 살짝 더해 넣은 것이다.
모네의 정원에 들어서며 세상의 눈을 감고 가슴의 귀를 연다. 정원 어딘가에서 꽃잎이며 수면을 쓰다듬는 바람이 사르륵 귓불을 간질이는가 싶더니, 스네어 드럼이 일으킨 것 같은 자르르한 진동이 피부의 돌기를 솟게 한다.
미술평론가인 아르센 알렉상드르는 “지베르니에 가서 모네의 정원을 보기 전까지는 그를 진정으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제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언어를 통한 이해 능력은 결코 보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이곳 모네의 정원에서 다시 한번 알게 된다.
모네의 정원은 언어를 왜소하게 만드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사물과 빛과, 바람과 계절을 느끼고 그것들을 읽어내는 능력만이 모네의 삶과 그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이 아름다운 정원에서 4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꽃과 나무, 연못과 수련, 다리와 하늘, 물과 빛을 캔버스에 차곡차곡 옮겨 내며 살았다니, 지베르니에서 모네는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할 것 같다. 모네의 정원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고요하고 평온하다. 고흐의 마을을 다녀오며 먹먹해진 가슴에 하늘 햇살의 온기와 들풀과 들꽃의 싱그러운 물기가 차오른다.
모네의 그림은 얼핏 정원의 풍경을 그대로 그린 것 같다가도 자세히 보고 있으면 하나하나의 사물이 분해되어 그 안에 담긴 것을 알게 된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파스텔로 쓱쓱 터치한 것 같아 보이지만 가까이에 바로 앞에서 보면 빛의 질감이 붓의 터치마다 묻어 있음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모네의 정원에선 빛이 먼저인지 사물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빛이 사물의 형상과 인상을 만들고 있고 사물이 있기에 빛이 제대로 반짝일 수 있으니 빛과 사물을 분리하려는 이성은 어리석을 뿐이다.
행여 한두 주 미루어서 이곳에 왔더라면 한껏 부풀어 오른 수련 꽃잎이 초록이 물든 연못에 제 얼굴 비추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걸음이 무겁다. 들풀들과 꽃들이 형형색색의 수다를 늘어놓고 있는 모네의 정원이 6월의 낯빛을 파란 하늘에 흩뿌리고 있다.
이곳에선 사람도 꽃이 되어
티끌 하나 없는 낮과 밤을
두 눈 말갛게 깜빡이며
가만히 지새우게 된다
사각사각 내딛는 발걸음에선
초록의 향기가 툭툭 터져 나고
붉고 하얗고 노란 꽃빛의 부유에
온몸이 알록달록 물든다
잘 닦인 거울 같은 연못 가에는
지나던 구름이 내려앉아
뽀얀 엉덩이 걸터앉아 쉬고 있고
바람의 손길이 쓰다듬는 수면에선
이제야 꽃봉오리 피어내는 수련이
얼키설키 기분 좋은 수다에
시간 줄을 놓고 있다
물빛인지 하늘빛인지
구분할 수 없는 코발트빛 파랑이
초록의 나무 그늘에 가려진 저기에서는
주인 잃은 조각배 하나가
덩치 큰 중년의 새 한 마리처럼
삐걱삐걱 허밍 같은 낮은 곡조를
바람의 추임새에 맞춰 중얼거린다
꽃밭 같기도 하고
숲 속 연못 같기도 하고
구름 적당히 낀 하늘 같기도 한
모네의 정원에서
스케치 없는 그림 한 장을
쓱쓱 가슴에 그려 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