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파리에서는 날마다 검은 활자의 축제가 열린다

24. 파리에서는 날마다 검은 활자의 축제가 열린다 (ver.4)


낯선 도시의 어느 길가에서 잉크 향 검게 박힌 낡은 종이뭉치를 뒤적이게 되는 것은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작은 즐거움이다. 센강을 따라 걸어 다니다 보면 강둑을 따라 늘려 있는 철 지난 책들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럴 때면 신경을 조금 세우는 것이 좋다. 갓 잡아 올린 생선 같은 강물의 파닥임에서 꽃 향기보다 더 진한 잉크의 향기를 맡을 수도 있으니.



종이 신문을 펼쳐 든 늙은 노점상의 돋보기안경 너머로, 세월에 박혀 있던 건지 활자에 박혀 있던 건지, 검은 잉크 향기가 지나간 어느 날의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죄판 위에 놓여 있던 영문판 <<The Little Prince>>를 집어 들고 몇 페이지를 넘기지만 그의 고개는 들려지지 않는다. 그가 팔려는 것이 세월인지 헌책인지 알 수 없다.

"나도 이 강변에 앉아 쿰쿰하게 삭은 잉크 향을 팔아 볼까."


센강의 이편저편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다가 찻길 건너에서 한 눈에도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책방을 발견한다.

"아 다시 여기에 왔구나."


두 발로만 걸어 다니더라도 가야 할 곳은 다 가볼 수 있는, 생각보다 좁은 도시가 파리이다. 찻길을 건너서 <SHAKESPEARE AND COMPANY>가 박혀 있는 간판 아래에 선다. 이곳이 1919년에 개업하여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 나오는 파리의 책방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이다.


아쉽게도 책방의 이 자리는 처음 책방을 열었던 장소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 어니스트가 들리곤 하던 그 시절의 책방도 아닐 수밖에. 당연히 현재 책방의 주인은 어니스트에게 책을 빌려주던 사람이 아니지만, 공식적으로는 이곳이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전통을 잇고 있는 파리의 명물 책방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간판 가운데에 걸려 있는 셰익스피어의 얼굴과 선반에 늘려 있는 손 때 묻은 헌책들의 호객행위에 이끌려 초록색 문을 열고 책방 안으로 들어선다.


지독하리만큼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파리지앵과 파리지앤느를 떠올려보면 센강의 강변에서 만나는 '미국인 헤밍웨이'의 족적과 '영국인 셰익스피어'라는 상호에서, 무척 생뚱맞긴 하지만 파리다운 커다란 자유와 포용력이 느껴진다.


파리의 자잘한 일상조차 축제인양 느꼈던 헤밍웨이의 글이 떠오른다.

"날마다 파리는 축제이다."


이 책방은 영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에 이어 <비포>(Before) 시리즈의 두 번째 편인 <비포 선셋>(Before Sunset)의 초반부에서 남자 주인공 제시와 여자 주인공 셀린느가 재회하는 장소이고 또 다른 영화 <미드나이트 인 파리>(Midnight in Paris)에서도 영상에 등장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이 느껴지는 실내로 들어서면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통로를 에워싼 나무 책장과, 천장까지 빼곡하게 꽂힌 책과, 발을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이, 책을 좋아하던 누군가의 옥탑방인 듯 익숙해서 편안함이 느껴진다. 살아보면 알게 된다. 편안함이란 익숙함이 주는 것이란 걸.



새책인 것 같기도 하고 헌책인 것 같기도 한, 누군가의 손때가 살짝 묻어 있는 몇 권을 만지작거리다 보니 학창 시절 뒤적거렸던 책들이 떠오른다. 내 삶의 행적을 기억하며 아직 서재의 책장을 지키고 있는 책들과 기억의 선반에만 꽂혀 있는 책들, 시간이 삭힌 그네들의 향기가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선반에 스며든다. 세월의 흐름은 뒷마당 장독에 담긴 장을 쿰쿰하게 띄우듯, 그 시절에 읽어 내렸던 활자들에게 더욱 깊은 향이 배이게 하는 것 같다.


“그래 살아가다 보면 누렇게 색 바래어 가는 것이, 비록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법이지.”


책장 사이로 난 작은 나무 창을 통해 파리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스물의 중반, 후미진 골목길에서 찾곤 하던 찻집 <창가의 오후>를 더듬는다. 하늘 높이 뜬 오후의 햇살이 한두 뼘 겨우 창틀 너머로 스며든다. 상대적으로 어두운 서점의 실내에는 검은 잉크와 철자의 파편이 일으킨 먼지가 뽀얗게 부유한다.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돌아 1층으로 내려온다. 서로에게 무심한 파리의 사람들과 관광객을 비켜지나 책방 밖으로 나선다. 책방 바로 옆의 <SHAKESPEARE AND COMPANY Cafe>에서 내리는 진한 에스프레소의 향기에서 오래된 잉크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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