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에펠탑에서

27. 에펠탑에서 (ver.4)


이런저런 생각을 뒤적이며 줄의 길이가 줄어들기를 기다린다.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는 동안에는 자리를 지키는 밖에는 딱히 할만한 것이 없다. 줄 서기는 사람이 살아가는 한 모습이긴 하지만 시간이 길어지게 되면 마음까지 지치게 만든다.

“차라리 걸어서 오르는 게 나았겠다.”


편안함을 쫓은 길이 오히려 피곤함을 더하고 있으니,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이건 간에 선택은, 긍정적인 결과만큼이나 부정적인 결과 또한 따르게 되는 행위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계단을 걷는 것이 긍정이고 리프트를 타는 것이 부정이라니, 그 참,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그 둘을 구분하였단 말인가.”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녀 보지만 선명한 어떤 것이 만져지지는 않는다. 하긴 언제나 이랬었다. 막상 찾으려면 점점 막연해져 가는.

“그러니 언젠가 다시 맞닥뜨릴 이 상황에서 어느 줄을 선택하게 될는지, 지금은 알지 못할 수밖에.”


‘판단의 유보’라는 점잖아 보이는 문구에다가 유연함이라는 애매모호한 단어를 이겨 넣는다.


*** ***


이제 에펠탑의 두 번째 층이다. 오를 곳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바람은 아래에서보다 훨씬 거세다. 바람과 물방울에 차가워진 쇳덩이의 스산함이 몸을 시리게 한다. 타워 카페의 창가에 앉아 파리와 센강을 내려다본다.


구불구불한 물줄기 하나가 포로수용소의 담장 같이 파리의 남북을 음흉하게 갈라놓고 있다. 그 물길을 따라 오르쉐 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과 노트르담 대성당이 사내아이가 툭 던져놓은 장난감처럼 땅바닥에 깊이 박혀 있다. 허공에서 내려다보는 파리는 대리석 돌덩이를 통째로 조각해 놓은 듯 반듯해 보인다.


쇠를 땋아 이어 붙인 철탑 위에서 내려다보는 인간의 삶은 하루살이의 한나절 나기 같이 미미할 뿐이다. 돌 하나 슬쩍 던지면 금방이라도 폭삭 내려앉을 것만 같은.

회색의 상자와 상자 사이로 난 미로에 갇혀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애처롭게 느껴진다.


아메리카노 커피보다는 강하지만 에스프레소 커피보다는 부드러운, 그래서 마시기에 딱 좋은 프랑스식 커피의 향기에 가슴이 열린다. <La tour Eiffel>이라는 도도한 여인의 은밀한 속삭임에 시간을 잊는다.


*** ***


철탑 여인의 유혹을 겨우 떨쳐내고 땅의 세상으로 내려온다. 저기 허공의 세상에서 어쩌면 잠시 정신을 놓아 버렸던 것도 같다.

“다행이다. 돌아올 길을 잃지는 않았으니.”

비인지 안개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물방울들이 으슬으슬 몸을 시리게 만든다. 검은 우산으로 하늘을 가리고 파리의 강줄기를 따라 걷는다. 인간의 거리에 고여 있는 물웅덩에서 그녀 <La tour Eiffel>의 잔상이 일렁거린다.



The Eiffel을 꿈꾸는 흐린 하루

불 꺼진 파리의 식어버린 촛대를 오른다

차갑게 타오르는 온기 없는 촛대는

아무렇게나 갈긴 누군가의 낙서 같다

허공을 향해 걸어가는 산책길에는

무수한 어제가 박제되어 늘려있다

추억의 갤러리를 지나

기어이 기어 오른 삶이 물방울에 갇힌다

이윽고 팽팽해진 몸뚱이는

바람에 실려 하늘을 유영한다


잿빛 새의 날갯짓이

하얀 구름 사이를 떠다니다가

어느 돌의 바닥에 내려앉는다

허 어쩌랴

이 희뿌연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함을

멀리 가물한 저것은 도시의 오아시스인가

허공에서 산란되는 낮의 빛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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