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오는 날에는 샤갈의 마을에도 눈이 내릴 것 같았다. 그런 날 찾은 카페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에선 LP판 골에서 긁혀 나온 하얀 지지직거림이 갈색의 커피 향을 타고 조도 낮은 실내 공간을 날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 다행이었던 것은 스타벅스와 같은 체인형 커피 가게 하나 없던 좋은 시절을 대학가에서 지냈다는 것이다. 그때의 커피 가게들은 제각각 그들 나름의 울림을 지니고 있었기에 떠돌기 좋아하는 젊은 놈의 방문을 늘 심심치 않게 해 주는 재주를 부리곤 했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중얼거릴 때면 샤갈의 그림 중에 분명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작품이 있을 거라 여겼었다. 여겼다기보다는 분명 그럴 거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확신하였었다. 그 참, 세월은 늘 어설픈 현명함만을 더해 주다가 훌쩍 떠나가 버리곤 하니 반가울 때도 있지만 성가실 때도 있다.
산타가 없다는 것을 알아 버린 첫 기억이 분명치 않은 것처럼 샤갈의 작품 중에는 〈마을에 내리는 눈〉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기억 또한 희미하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기억나지 않는다기보다는 기억에서 지워 버린 것에 가까운 것 같다.
나 같은 누군가에겐, 시인 김춘수(1922/11/25–2004/11/29) 님과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7/6-1985/3/28) 그리고 눈 내리는 마을은, 겨울이면 성문 앞 우물가의 보리수를 어김없이 지나가야만 하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처럼 겨울 창에 엉켜 붙는 속살 뽀얀 추억의 오브제이다.
파블로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화가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샤갈의 그림 중에 김춘수 님 시의 모티브가 된 작품은 〈비테브스크에서(Over Vitebsk)〉이다. 샤갈은 이 제목의 작품을 몇 가지 버전으로 남겼는데 그중에서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이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알려져 있다.
하얀 눈이 샤갈의 마을 비테브스크를 덮고 있는 어느 겨울날, 자루 하나를 어깨 한쪽에 메고 지팡이를 손에 쥔 남자가 하늘 위에 있다. 얼핏 날아가는 것도 같고 날아오는 것도 같지만 ‘난다’라는 행위에 대한 선입견이 작품의 감상을 막아서지 않도록 하려면 좀 더 꼼꼼하게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하늘에 정지해 있다 또는 하늘에 정지해 버렸다, 또는 그냥 그곳에 떠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샤갈이 러시아의 비테브스크라는 마을의 한 유대인 정착촌에서 태어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작품을 감상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기울어진 가로등과 마을 위 하늘에 비스듬히 멈추어 버린 사내가 나타내는 것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 분분하다. 아무튼지 러시아의 한 유대인 정착촌의 겨울 한때는 샤갈의 손을 통해 동화의 삽화 같은 모습으로 캔버스 위에 인화된 것이다.
피카소와 샤갈, 이 두 위대한 예술가는 흔히 같이 떠올려지긴 하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에서 받게 되는 울림의 질과 양은 시간과 장소, 감상하는 이의 지식과 감정에 따라 큰 다름이 있게 된다. 파리의 이미지와 너무 잘 버무려져 버린 피카소에 비한다면 샤갈은, 유대인이라는 태생적 배경 때문인지 파리의 이미지와는 왠지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뉴욕현대미술관의 벽면에 걸린 샤갈의 작품 〈비테브스크에서〉 앞에 서서 김춘수 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과 파리의 겨울, 그 시절의 커피 가게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