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고흐의 밀밭을 걷는다

9. 고흐의 밀밭을 걷는다


파리를 찾을 때면 조금 더 멀리까지 길을 나서게 된다. 그곳 들판의 누런 밀밭 사이를 걸어 다니다 보면 빈센트 반 고흐라는, 고독한 그림쟁이 사내를 만날 것만 같기에.

파리의 돌집 사이로 난 돌길을 걷는 것과 오베르 쉬즈 우아즈(Auvers Sur Oise)의 밀밭 사이로 난 흙길을 걷는 것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날 고흐의 마을 오베르 쉬즈 우아즈는 또 다른 파리가 된다.


고흐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을 그 들판 끝자락에 삼나무 몇 그루가 서있고, 밀밭 사이로 난 좁은 흙길은 지편성까지 길게 이어져 있고, 진청색 하늘에는 노란 별빛이 빙글빙글 반짝이고 있고, 허연 구름은 금세라도 터져버릴 듯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고, 검은 새들이 바람을 따라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다.


고흐의 들판은 짚풀을 엮어 올린 초가집 지붕에 슬쩍 걸린 저녁 햇살처럼 나른하기도 하고, 누런 한지를 더덕더덕 이겨 바른 시골집 벽면처럼 마냥 정겹기도 해서, 누추한 상차림에도 아무 부끄럼 없이 부른 벗과 이빨 빠진 막걸리 사발을 기울이는 듯한 거나함에 빠지게 만든다.


*** ***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면 구름이 흐르는 모습이나 별빛이 반짝이는 형상이 까마귀가 후루룩 날아가는 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까마귀를 어떻게 보느냐는 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인 것 같다. ‘검다’는 것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은 고흐의 그림을 바라보는 마음의 문을 좁히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고흐의 까마귀를 ‘어둡다’ 또는 ‘스산하다’와 같이 자신의 느낌에 빗대어 부정적으로 얘길 하곤 한다. 게다가 까마귀에 대한 일반적 편견과 그 비행 행태를 시빗거리 삼아 만나본 적도 없는 ‘고흐의 심리 상태’에 대해 운운하기를 마다하지도 않는다.


가만히 그 얘기들에 귀를 기울여 보면 얼추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이내 손사래를 치게 된다. 사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상관할 바는 아니다. 어차피 빈센트는 더 이상 말이 없으니 보는 이의 생각은 밀밭 위를 나는 까마귀 무리처럼 전한 것 없이 그냥 자유로워진대도 괜찮겠다.


*** ***


[고흐 마을]이란 별칭이 없다면 [오베르 쉬즈 우아즈]라는 마을의 이름을 그냥 흘려들었을 것 같다. 마을길을 따라 고흐가 오르던 언덕길을 걸어 오른다. 한 십 여분을 그렇게 걸었을까. 커다랗게 펼쳐진 밀밭 가운데에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그림이 세워져 있다. 그림을 가둔 각진 틀이 딱딱할만도 한데 그런 느낌일랑은 느껴지지 않는다. 밀밭과 밀밭 사이로 난 좁은 길에 파란 하늘을 미술관의 벽면 삼아 걸린 그림에서는 신비함마저 풍겨 나고 있다.


상상의 들판길을 걸어간다. 톡 톡 손가락을 휘저으며 까마귀의 수를 세다가 얼른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숫자를 헤아리는 본능 따위는 잠시 잊었어도 좋았을 것을.

저 까마귀들이 지금 막 하늘로 오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막 밀밭으로 내리고 있는 것인지 문득 궁금하다. 생각의 갈래는 바람을 따라 몰려다니는 들판의 밀처럼 이리저리로 휩쓸려 간다.


“그는 밀밭 위 하늘로 오르고 싶었던 것일까.”

“그는 저 누런 파도 위에 후드득, 별빛처럼 내려앉고 싶었던 걸까.”

“빈센트는 떼를 지어 나는 까마귀를 보면서 자신의 고독을 떠올렸을지도 몰라.”

“저 까마귀 중에 유독 더 검은 저 한 마리가 어쩌면, 빈센트 그이지 않을까.”


살아가다 보면 주어질 답보다 질문이 많아지는 때가 있다. 발걸음은 파리로 돌아가고 있지만 고개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다행이다, 세상엔 남겨둬야 할 것이 저리도 많아서.”

어둠이 내리자 카페를 찾아 파리의 거리로 나선다. 파리의 길에서 고흐의 마을 오베르 쉬즈 우아즈의 밀밭 냄새가 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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