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가방 안을 넉넉히 비워 내고 다시 길을 나설 채비를 한다. 어차피 더는 비울 것도 채울 것도 없기에 사실 채비라고 할 것도 없다. 길을 걸어 다니는 것은 오랜 버릇일 뿐이지만 파리에서 길을 걷다 보면 어딘지 모를 별스러움이 불쑥 끼어드는 것 같다. 하긴 그래서 파리를 자꾸 찾는 것이긴 하다.
오늘도 색다른 무엇인가가 있을 것 같은 날이다. 지도를 펼쳐 들고 관광지를 벗어난 몇 개의 길을 망막에 새겨둔다. 호텔 문밖으로 나서자 커다란 돌덩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을 막아선다. 걸음 떨어져서 본 개선문은 위풍당당하고 멋스러운 파리지앵 같이 느껴지지만 바로 앞에서 보면 덩치는 크지만 곱고 가는 파리지앤느 같이 느껴진다.
손을 펴서 바람의 방향을 가늠한다. 어제와는 반대 방향으로 불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바람을 따라 개선문을 돌아 걷는다. 보는 방향을 조금만 바꾸어도 어딘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파리는 그런 것들을 만나게 되는 일 정도는, 입꼬리 한 번 삐죽 올리면 그만인 일처럼 만들어 버리는, 그래서 금세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게 하는 신묘한 재주를 가진 도시이다.
파리는 변명 많고 변덕스러운 곳이긴 하지만, 그만큼 질리는 일 또한 없는 도시이다.
샹젤리제를 타고 올라온 바람이 나지막한 소용돌이를 만든다. 에뚜와 광장에서는 사람도 바람처럼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개선문을 돌아야만 한다. 그게 에뚜와 광장과 개선문이 정한 규칙인 듯하다.
원을 제대로 그리는 사내가 멋있는 파리지앵이 된다고, 원을 예쁘게 그리는 여자가 아름다운 파리지앤느가 된다고, 바람의 공명이 말하는 것 같다. 거대한 돌덩이를 느릿느릿 돈다. 바쁠 것 하나 없으니 이대로 몇 바퀴를 더 돌다 보면 멋있는 파리지앵이 될 것 같다.
찻길을 건너서자 또 다른 바람 줄기가 갈 길을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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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객 하나 없는 길이기에 손에 잡은 지도와 감각에만 오롯이 의존해야 한다. 곧바로 갈 수 있는 빠른 길이 마냥 좋은 길인 것만은 아닐 수 있다. 둘러간다는 것은 질러간다는 것의 반대말이 아니라 보어 일뿐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분명하고, 그 길에 눈길 끌만한 작은 것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제법 멀리 둘러간다고 해도 그리 나쁠 일은 없겠다.
파리의 주택가를 둘러서 걸어간다. 어디에나 늘려있던 상점들은 벌써 자취를 감추었고, 반듯하게 이어진 돌길의 모서리와 가장자리에는 파리스러운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열을 맞춰 가지런히 주차되어 있다.
그 길에서 만난 어린이 놀이터가 파리도 사람이 살아가는 도시라고 말하고 있다. 제목 모를 조형물 아래에 쪼그려 앉아 놀이터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이며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이방인의 눈에는 현지인들의 일상조차 흥미로운 구경거리이다. 그러고 보니 등 뒤의 조형물이 시골마을 입구에 서있는 장승같기도 하다.
길을 둘러가다가 보면 예기치 않게 마주친 것에서 어떤 설렘이 일어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따뜻한 액체의 기운을 빌리는 것이 좋다. 등가방을 내려 챙겨 넣었던 텀블러를 끄집어낸다. 갇혀 있던 연갈색의 커피 향이 일순 훅 뿜어져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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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은 커피 향에도 얼큰해질 때가 있다. 취기 가득 오른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파리의 마을길을 걸어 다니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만난다. 파리의 주택가 한가운데에 일본식임이 분명한 정원과 집 한 채가 쇠로 만든 검은 담장 안에 똬리를 틀고 있다.
파리에서 만난 전통 일본식 정원과 집이라니, 머리의 지식을 총동원해 보지만 한계에 부딪힌다. 여행길에서의 궁금증은 상상의 날개라도 달려는 듯 실마리를 찾아 더듬거린다. 저 검은 철책 안의 작은 공간은, 빛을 따라 큰 바다와 산과 들판을 건너온 신기루란 말인가. 오버랩되는 지식과 상상의 산물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궁금증에 접속했던 스마트 폰의 지식 검색 창을 닫아버린다.
지도 한 장 손에 잡고 나선 여행길에서는 적당히 남겨 둔 빈 지식이, 등에 멘 가방의 비어 있는 공간처럼 걸음을 가볍게 만드는 법이다. 이럴 때면 빈 것이란 게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애써 더듬고 싶지 않을 때면 저 혼자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다. 지도를 꺼내 지금의 위치를 가늠해 본다. 호텔 문을 나선 지는 제법 되었고 센강의 강물 냄새가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것을 보니 에펠탑이 그리 멀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파리에서는 이 정도만 알게 되더라도 충분하다. 파리의 길은 조금 더 두리번거리며 걸으면 되기에.
그리 멀리 걸어가지 않아 Place de Tokyo(도쿄 광장)와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도쿄 미술관)라는 글자가 새겨진 안내판을 만난다. 설익었던 궁금증을 걸음과 시간이 익힌 것이라고 여겨 본다.
*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13 Av. du Président Wilson, 75116 Paris, France)는 트로카데로 광장(Place du Trocadéro)과 에펠탑 부근에 있는 일본 미술관으로, 기존의 미술관이 가진 장엄함과 엄숙함에 반기를 든 재기 넘치는 장소로 소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