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빛과 어둠에 두었던 논리의 시선을 달에게로 옮겨 보자. 태양이 지상을 지배하고 있는 시간에 있어서 양陽과 음陰의 기준은, 사물의 밝음과 그것에서 느낄 수 있는 온기의 정도를 고려한 것이다. 이 단어들을 사전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인다면 본다면 ‘양’은 ‘볕, 양지, 밝다’를 뜻하고 ‘음’은 ‘응달, 습기, 축축함’을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온기의 개념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이 보이게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용하고 있는 양지陽地와 음지陰地라는 단어에는 ‘따뜻함, 따사로움, 더움’이나 ‘시원함, 선선함, 차가움’과 같이 온기의 정도가 내포되어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화자의 감상과 연관된 의미가 내포되고도 있다.
어쨌든 낮과는 달리 밤의 달빛 아래에서는 오직 밝다는 것과 어둡다는 것만으로 양과 음을 구분할 뿐 온기를 양지와 음지의 기준으로 삼지 못한다. 그것은 달빛 아래에서는 오직 밝은 곳과 어두운 곳만이 존재할 뿐이라서 달빛의 조사에 따른 따뜻한 곳과 차가운 곳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척도’란 것을 마련해야 한다. 이성의 개입은 척도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판단의 결과에 더욱 강한 논리를 부여할 수 있게 한다. 반면 단순화된 척도는 감성이 개입할 여지를 여기저기에 남겨두기 마련이라 그것을 기준으로 삼은 결과는 늘 논란의 도마 위에 오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허술함을 ‘논란조차도 허용하려는 인간다운 포용력’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사람이나 논리나 어딘가 부족한 구석이 있어야만 말 한마디 붙여볼 여지가 찾아지기 마련이다. 원래 너무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의 돌에는 이끼가 끼기 어려운 법이다. 빈틈이 보인다는 것은 이것저것 기웃대며 살펴보기를 좋아하는 생각 많은 이에겐,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욱 매력적인 일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빛의 여부로만 양과 음을 구분케 하는 달의 포용력이 태양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이러한 이유가 태양을 ‘강하고 엄한 아비’에, 달을 ‘유순하고 편안한 어미’에 비유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의 살아남기 본능은 강한 것을 동경하게 만든다. 그래서 강한 자의 이성이 언제나 지배적인 논리의 근간을 형성하여 왔고 이에 따라 낮의 태양은 언제나 인류의 숭배를 받게 되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라고 부르고 있는 12월 25일은, 짧아진 겨울의 태양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날에 맞추어 로마의 태양신인 미트라를 기념하는 날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하니, 태양은 인간의 본능 속에 잠재된 영원한 동경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연약한 인간은 늘 강한 것을 경외하였고 인간의 역사는 항상 강한 자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왔다. 그들은 ‘살아남았기에 강한 것’이 아니라 ‘강하기에 살아남은 것’이다. 그래서 강한 태양이 인간이 만들어 낸 논리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2.
달의 포용력은 밝음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낮 시간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있다. 지친 몸과 영혼을 이끌고 그 아래에 서게 되면 달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슴을 열어 안아준다. 그렇기에 달은 물리적인 온기와는 상관없이 포근하고 편안한 존재이다.
온기 없는 달의 빛이 어미의 품 같이 따뜻하다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물리적 온기를 가지지 못한 달빛에서 가슴의 포근함을 느끼게 되는 인간의 감상은 역설적이어서 안쓰럽기까지 하다.
달이 인간 삶에 미치는 영향은 태양의 그것과는 크게 다르다. 어쩌면 태양과 달은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인간의 세상을 내려보고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 달을 숭배하는 인간은 그 밝은 면만을 노래한다. ‘밤이 밝다’ 또는 ‘밤이 어둡다’는 표현은 오직 달빛이 내리쬐는 밝기에만 따른다.
낮은 이성의 아비이고 밤은 감성의 어미이다. 남자는 낮 빛 아래에서 몸을 움직여 일을 하고 여자의 몸은 달의 주기를 따라 월경한다. 그래서 여자가 남자보다 더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
남자란, 여자보다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조건 몇 가지에 있어 강한, 그래서 우세하다고 여기는, 사내라는 특정 종의 통칭이다. 그 사내들에겐 처음부터 감성적이란 것이 부족하였기에 이성을 내세우며 따지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또한 쉽게 흥분하고, 분명 중요한 것이란 것을 알긴 하지만 왠지 귀찮을 것 같아 보이는 것에 대해선 여자보다 쉽게 판단을 내려 버리는 허술한 구석이 있다.
태양의 지배를 받는 사내의 이러한 행태는 어쩌면, 아침의 해 뜸과 저녁의 해짐에 있어 그 물리적인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일 수 있다. 그 시간, 여명 또는 노을에 붉게 왜곡된 사물이 사내의 머릿속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인 것이다.
그 사내들도 밤이 되면 안식을 찾아 제 집을 찾아들기 마련이다. 남자에게 집은 여자이고 밤의 안식은 오직 여자의 품에서 찾아지게 된다. 온전치 못한 안식은 불안한 일탈을 통해, 스스로 인지 못하는 사이에 낮의 남자를 점차 피폐하게 만든다. 그래서 밤의 안식은 남자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생명수이기도 하다. 그 밤의 생명력은 달에서 나온다. 결국 달은 인간, 남자와 여자 모두를 생명을 가진 온전한 존재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달에겐 반대의 면이 존재한다. 인간은 달의 한 면인 오직 밝은 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듣고자 하는 것만 들으려 하는 인간의 좁은 본능을 달이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달의 또 다른 면은 밤이 밝을 때 어둡고, 어두울 때 저 혼자 밝을 수 있다. 또는 그 면은 항상 어둡기만 할 수도 있지만 지상의 누구도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한다.
물리적인 인간의 눈으론 담을 수 없는 또 다른 한 면은 감성의 심안을 통해서만 알아차릴 수 있다. 이것이 논리적으로 존재하면서 감성의 가슴을 열어야만 보이는 또 다른 달의 한 면, Another side of the moon이다.
해가 숨어버린 어두운 밤하늘에 자리 잡은 달의 밝은 면과, 그 뒤에 있을 어두운 면은 양면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달의 주기를 따르는 글쟁이와 달 빛 아래 잠 못 이루는 이방 여행자는 자신의 양면성을 결코 부끄럽게 여겨야 할 이유가 없다.
그것은 글쟁이와 이방 여행자의 양면성의 원인이 달, 저 밤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을 온전하게 평가할 수 있는 세속적인 잣대는 결단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 글쟁이와 이방 여행자는 세상 일체의 판단에서 배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빛과 어둠, 달의 양면성에서
스스로의 위안과 자유의 논리를 찾는다.
그래서 난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