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만큼 산책과 커피를 좋아한 이가 또 있을까. 설혹 있다 하더라도 이미 그에게만 열려 버린 마음의 귀에는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산책과 커피라면 루소, 그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그리고 이곳 맨해튼은 그가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글처럼 고독한 산책자가 몽상에 빠져들기에 좋은 도시이다.
장자크 루소는 1778년 에름농빌에서 아침 식사 도중 쓰러져 점심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아, 이제 더 이상은 커피 잔을 들 수 없겠구나.”라는 말을 남겼다는 일화는 장자크가 얼마나 커피를 좋아했는지, 그의 커피에 대한 지독한 애정을 가늠할 수 있게 만든다.
누군가의 삶을 알게 되는 것이 때론 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을 막아서는 울타리가 되기도 한다. 소설가이기도 음악가이기도 하고 사상가이기도 한 장자크 루소의 삶이 그러한 경우이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그의 통속적인 삶과 책장에 꽂혀 있는 사회적인 이성을 함께 들여다본다면 장자크는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지독한 에고(ego)를 앞세워 방탕과 무책임을 산책길 친구 삼은 그의 삶을 보자면 가난과 모순을 마치 커피를 마시듯 유희한 것만 같아 그를 비난하는 이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그의 삶을 통속이란 범주에 끼워 넣는다면 통속이란 말의 개념을 오직 그만을 위해 너무 확장시켰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그를 변호하고 싶은 것은 그를 아끼는 또 다른 에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그 어떤 행적이 그의 뒤를 따랐던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던들, 장자크의 천재성은 그를 저녁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하나로 박아 버린 것을. 커피와 산책 그리고 자유라는 이름의 에고를 즐겼던 장자크 루소는 뉴욕을 살아가는 이들보다 더 뉴요커다운 에고이스트인 것이다.
오후 내 빌딩 그림자에 갇혀 있던 좁은 하늘에서 어둠의 기운이 느껴진다. 쉬어갈 벤치 몇 개 툭툭 던져 놓은 공원 한편에 앉아 아직 식지 않은 커피의 온기를 만지작거린다.
닫혀 있던 둥근 플라스틱 뚜껑을 연다. 커피 향에 채색된 뽀얀 물기가 저녁 호수에 내린 물안개처럼 가만히 고여 있다. 키 큰 빌딩과 나뭇가지 꼭대기에 걸린 하늘에는 검회색 어둠이 스며든다.
늘 그렇듯 시간은 쉬이 지나가는 법이다. 뻑뻑한 두 눈을 몇 번 껌뻑이다가 종이 잔을 살짝 흔들어 본다.
“아직 남았구나.”
한 번쯤 더 짚어 보는 것은 도시에서의 삶이 지어낸 오랜 버릇이다.
바닥에 깔려 남은 진갈색의 묽은 액체 몇 방울로 저녁의 갈증을 축인다. 온기가 식어 버린 미국식 커피에서는 진하게 우려낸 블랙 티의 느낌이 난다. 아무래도 좋다. 입안에 고인 이 검은 물이면 저녁의 사색 한줄기 건져 올리기에는 충분하다.
어제의 그 무렵처럼 시간은 흘러간다. 입에 대었다가 내려놓기를 뫼비우스의 띠 돌듯 반복하다가 가벼워진 종이 잔의 느낌을 알아차린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더 이상 커피 잔을 들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는 장자크 루소도 지금쯤이면 잔을 내려둔 채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다.
주인 없는 종이 잔 하나가 옆자리 벤치 귀퉁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혹시 그가 다녀간 것일까. 왜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까.”
가까이에서 일어난 무언가라고 해서 꼭 때맞춰 알게 되지는 못하는 것은 내가 가진 인지능력의 허술함 때문일 것이다.
맨해튼의 거리에 밤 그림자가 짙게 깔린다.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자 현란하게 피어났던 불꽃들이 하나씩 자신의 문을 내리고 있다. 늘어진 걸음으로 한 블록을 겨우 지나다가 검은 실루엣의 한 사내를 발견한다.
오른쪽 검지에 걸린 커피 잔과 왼쪽 옆구리에 꽂힌 두 권의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걸음을 재촉하여 그의 뒤를 쫓는다. 밤의 어둠에 적응된 눈이 책에 박힌 글귀를 구분해 낸다.
1776년 출간된 《루소, 장자크를 재판한다(Rousseau juge de Jean-Jacques)》와 그의 미완의 저서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Les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이 표지 모서리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아, 장자크 루소, 그이구나.”
걸음을 멈춘다. 누구인지 알았으니 더 이상 그를 쫓을 필요는 없겠다. 이미 떠나간 이는 마음으로만 간직해야 하는 법이다.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배웅한다.
“다행이다. 더 이상 새 커피 잔을 들지 못할 것을 알았던 그는 마지막으로 잡았던 커피 잔을 내려놓지 않았으니.”
언젠가 다시 그를 만날 때면 커피 한 잔을 가득 부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그에게서 배운다. 커피를 좋아한다는 것은 산책길에서도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도, 결코 커피 잔을 내려놓지 않는 일이란 것을.
장자크가 남기고 간 커피 향을 호흡하다가 서재로 돌아온다. 쓱쓱 문질러 그려내는 나의 글이 그의 산책길을 닮으면 좋겠다. 묵힐수록 쿰쿰해지는 글의 향기가 어릴 적 시골 마을의 저녁 굴뚝에서 피어오르던 구수한 밥 냄새를 닮아 가면 정말 좋겠다.
글을 쓰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사색에 빠져서도 커피 잔을 내려놓지 못하는 것을 ‘장자크 루소 효과’라고 불러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