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렛잇비를 듣는 몽마르뜨의 한 때

18. 렛잇비를 듣는 몽마르뜨의 한 때


잔뜩 부풀어 올랐던 기대와 함께 찾았었던 오래 전의 몽마르뜨는 실망감만을 안겨주었었다. 그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젠 파리에 오더라도 몽마르뜨를 다시 찾는 일 따윈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런 작은 결심에도 불구하고 몽마르뜨는 파리를 찾을 때면 꼭 흘러들고야 마는 어딘가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는 낮은 구릉이다.


"혹시 모르겠다, 어떤 샤머니즘의 비밀스러운 주술이 몽마르뜨에 걸려있는지도."


아무튼 첫 인연을 맺었던 그날 이후부터 '몽마르뜨의 낭만'이란 건 치기 어린 젊은 날의 기대가 빚어내었던 빛바랜 유산인 듯 간주되었고, 현실에서의 몽마르뜨는 파리를 바라보면서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전망 좋은 언덕 내지는, 계단 한쪽에 엉덩이 걸터앉아 파리의 햇살과 관광객의 웅성거림을 즐길 수 있는 명소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하긴 몽마르뜨가 파리에서는 가장 높은 언덕이기에, 그것만으로도 파리의 명소가 되기에는 아무 부족함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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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하게 우려낸 홍차에 바게트 몇 조각을 곁들이다가 시간의 흐름을 깜빡 잊었나 보다. 시계의 시침이 벌써 이만큼 나 돌아가 있다. 객실을 나서기 전에 지도를 살펴본다. 몽마르뜨로 다시 흘러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몽마르뜨는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그냥 흘러드는 곳이다. 오페라(Opera)와 가까운 곳에 잡은 숙소이니 몽마르뜨까지는 곧장 걸어간다면 대략 삼십여 분, 쉬엄쉬엄 둘러 가더라도 1시간 정도면 다다를 수 있는, 걷기에 딱 좋은 거리이다.


파리는 걸어서 돌아다니기 좋은 도시이다. 거미줄을 짜 놓은 듯 반듯하게 뻗어 나간 파리의 길은 차가 다니기엔 좁을 수도 있겠지만 여행자가 걸어 다니기엔 충분히 넓어서, 한두 시간 정도의 거리라면 그냥 걸어서 가더라도 지겨움이라든지 피곤함 따위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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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길거리의 벽면에서 비틀스의 사진이 인쇄되어있는 종이조각을 발견한다. ‘파리와 비틀스’라니, ‘파리와 셰익스피어’보다 더 이물스럽다. 문뜩 걸음을 멈추게 하는 무엇인가에 마음을 빼앗기는 경험은, 걸어 다니기를 좋아하는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별스러운 간식거리와도 같다. 파리의 돌길을 비틀스의 <Let it be>를 흥얼거리며 돌아다닌다고 해도 괜찮겠다.


"그래,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속삭임은, 되는대로, 흘러가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지."


손에 쥔 지도를 곁눈질하며 이 길 저 길을 걸어 다닌다. 여행길에선 가야 할 방향만을 정해 두면 될 뿐이지 굳이 지름길을 택해야 할 이유는 없다. 피갈(Pigalle) 지하철역이 도로 가운데에 간판을 세우고 있는 것을 보니, 조금만 더 걸어가면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돌계단에 앉아 두 발을 길게 펼 수 있겠다.


길 가에 늘어선 아기자기한 수베니어 샵(souvenir shop)이며 카페를 두리번거리며 걷는 사이 언덕의 경사진 면을 따라 쌓아 올린 계단 더미에 도착한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그 언덕 꼭대기에서 파리의 낮 햇살을 하얗게 반사하고 있다.


공식적인 명칭이야 어찌 되었건 간에 길고도 넓은 이 계단은 사크레쾨르 대성당과 함께 몽마르뜨를 대표하는 명소이다. 파리를 찾는 관광객에게는 이 계단을 오르는 것이 곧 몽마르뜨를 오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 계단에게 [몽마르뜨 계단]이란 이름을 붙인다 해도 어느 것 하나 이상할 일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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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이어진 가파른 언덕 저기쯤에서 파리의 하늘만큼 말간 현의 떨림이 들려온다. 음의 파고를 따라 계단을 오르다 보니 언덕 중턱쯤에서 아이의 몸집보다 더 큰 하프를 연주하고 있는 악사를 발견한다. 귀와 입에 익은 곡이다. 조금 전 파리의 길 위에서 흥얼거리던 비틀스의 렛잇비가 보이 소프라노의 투명한 노랫소리 같이 울려 나오고 있다. 현의 부드러운 튕김이 하프의 울림통을 맴돌다가 몽마르뜨의 계단을 새벽안개처럼 감싼다.


인간이란 생각보다 단순한 존재인 것 같다. 기대치를 낮춘 몽마르뜨 언덕은 무명 악사가 연주하는 낯익은 한 곡의 노래만으로도, 새로운 감상의 잔물결을 일으킨다. 이럴 때면 걸음을 멈추고 악사 바로 앞 돌계단에 앉아 가슴과 귀를 한껏 열어도 좋겠다.

"익숙한 것이 편한 것인가 보다."


걸어두었던 마음의 빗장을 여니 오래전에 찾아 나섰던 몽마르뜨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순간 몽마르뜨가 지닌 감상적 가치(Sentimental Value)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고하다.


약간 흐리고 바람마저 스산한 날씨에, 하프의 선율을 타고 흐르는 렛잇비가 아니라면 몽마르뜨가 너무 쓸쓸해질 것 같다. 음악은 나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그래서 묵을수록 더 좋아지는 게 음악인 것 같다. 일어나는 길에 손에 쥔 CD 한 장은 값으로는 매길 수 없을 만큼의 추억이 몽마르뜨를 향해 흘러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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